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었을 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뇌가 흥분했다. 나 홀로 속되게 버틀러를 ‘돌려까기’ 달인이라 부르며 웃곤 했다. 버틀러에게 보부아르, 프로이트, 라캉, 데리다, 푸코까지 내로라하는 이들이 까인다. 섹스가 젠더와 같이 사회의 구성물이라는 버틀러의 말을 그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 <젠더 트러블>은 정말 재미있고 교양 높은 책이다. <젠더 트러블>을 읽고 나서야 이 세계의 다른 필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유명한 정희진 책도 그 후에 읽게 되었고, 권김현영, 김홍미리, 한채윤, 이민경 등 훌륭한 필자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버틀러를 잘 읽고 싶다는 마음이 닿은 것이 여성주의 철학공부이다. 막상 여성주의 철학공부를 하려니, 뒤로, 그 뒤로 더듬어 가는 책 읽기를 하게 된다.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로 이루어진, 김재인의 <생각의 싸움>은 철학하기의 이유를 말하는 책이다. 김재인은 철학이 언어에 대한 사랑이며,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 굉장히 중요한 활동이고, 생각의 싸움이다 요약한다. 생각의 학문, 철학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만, 기존의 강력한 전제를 바꾸려는 엄청난 싸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엄청난 싸움꾼들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칠게 더듬어보는 동안, 어떻게 이들의 텍스트로 여성주의 철학공부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지난 달에는 계급주의자며, 본질주의자라는 비판을 듣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철학책으로는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해설서로만 책을 읽었는데, 그야말로 본서를 읽는다는, 흥분이 생겼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뇌가 갑갑해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뭔 소리인지……. 이렇다, 저렇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머릿속에 도통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의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방정맞게도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는 말을 해 버렸다. 얼굴은 달아올랐으나 뱉고 난 말은 어쩔 수 없었다. 위대한 철학자라는 분이,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고 하신 분이 자기 도시 사람들만, 남성들만 우선이고, 다른 사람들 존재를 차별했다는 생각 때문에 읽는 흥도 떨어지고, 무작정 싫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입방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장덕천 시장의 트윗이 방정맞게 보였다.

불쾌했다. 류호정 국회의원의 등원 의상에 대한 발언들이 시끄러운 와중에(발언자 본인들의 발언 속에서, 자신들이 형성한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그러니까 부끄럽게도 막말이 쏟아지는 때에 우리시 시장이 이 여성혐오 문화에 협동을 하고 있으니말이다.

이른바 민주화 운동의 혜택을 받고 자라나 이제는 비례 의원이 된 류호정 의원을 까는 트윗 내용에 가장 눈을 찌르는 것이 ‘입법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케팅보다’라는 문구였다.

2020년 주목해야 하는 그것. 강간죄 개정안

2019년 국회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의사에 반하여’ 또는 ‘동의 없이’로 변경하거나 비동의간음죄를 별도로 신설하는 내용들을 골자로 하는 형법 개정안들을 발의했으나 회기가 끝날 때까지 개정을 하지 못했다.

강간죄 개정 운동을 해온, 전국 209개 여성인권운동단체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20대 국회가 실패한 강간죄 개정을 21대 국회가 우선적으로 수행해 주길 촉구해 왔다.

형법에서 강간죄로 처벌하려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항거 불능 상태,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정도로 폭행이나 협박을 받았을 때가 전제이다. 백혜련 의원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간음한’으로 바꾸자는 것들을 내용으로 한, 강간죄 구성요건을 다룬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6월 8일에 대표 발의하였다.

장시장 트윗에서, 직접 찾아보았다는 류호정 의원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류호정 의원은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 개정안’이라며 법안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백혜련 대표발의 개정안과 다른 점은,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 제목 자체를 ‘성적 침해의 죄’로 바꾸고, 강간, 간음의 법문도 성교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 32장의 제목은 1996년까지 ‘정조에 관한 죄’였다. 여성의 정조는 보호하고 지켜야 할 것, 유린·훼손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신체가 법익이었다. 개정 제목을 보니 지금 2020년은 이 32장의 제목을 타인에 의해 강요받거나 지배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로 성적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성적자기결정권을 법익으로 바꿔야 하는 때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총선에서 각 정당들이 내놓은 젠더 정책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비동의간음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고, 미래통합당은 강간죄 개정에 관하여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 정의당은 젠더폭력 3대 공약으로 ‘비동의 강간죄 조속 개정’을 약속한 바가 있다. 검토와 약속이 진행되고 있는 점은 반갑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의 의견이 수렴된 개정안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서양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의 원초적인 체계를 만든 사람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이 존재들이 어떻게 좋고 탁월하고 즐겁고 선한 상태로 삶을 이룰 수 있을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민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결여되어 있던 부분들, 바꿔야할 전제들은 바꾸어내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철학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생각은 바뀌는 것이고 생각과 생각이 만나면 싸우기도 하는 것이고 공고해지기도 하는 것이며, 생각은 즐거운 것이고 또 나에게는 한참이나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성폭력 이슈와 싸워온 여성들에게, 이제 일을 시작하는 초선 의원에게 좋은, 올바른, 탁월한, 훌륭한, 필요한 생각을 말을 전하는 공동체를 느끼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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