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학, 사회학의 원로 학자이며, 여성운동가였던 이이효재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신문에서 접했다. 맨 처음 선생님에 대하여, 조금 더 선생님에 대하여, 알게 된 것도 신문을 통해서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호주제 폐지, 부모 성 같이 쓰기 운동,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례대표제 도입, 50% 여성할당 운동에 이이효재 선생님이 중심에 있었다. 한국에 처음 여성학과를 만들게 된 것도 선생님의 힘이 컸다고 들었다. 선생님은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선, 실천하는 학자였다.

그래서 선생님을 존경했다. 1900년대 초반을 살아온 여성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을 뵙고 싶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진해에 내려가 인터뷰를 한 기억이 떠오른다.

선생님의 부모님은 1940대부터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업을 하였기에, 1924년에 태어난 선생님은 부모님이 돌보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했다. 두 번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갖게 된 그것, 더 많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아픈 마음을 얘기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도 정신대에 끌려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비극이 비켜갔던 것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본인은 운이 좋아 외국에 가서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라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었을 때였다며 전쟁이 났다는 것을 건너 들었을 때의 타는 감정에 대해서도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말씀 속에서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의아하기도 했다. 나란 개인은 사적인 욕망의 존재, 그럼에도 우리들의 삶을 조금은, 고민할 주는 아는 존재일 뿐인데, 선생님한테서는 아주 사적인 개인이나 자아의 느낌이 없었다. 선생님은 마치 우리들로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이것이 의문이었다.

선생님이 집에서 묵고 가도 좋다고 하셨지만, 그러기에는 선생님이 어려워서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분은 아니셨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선생님은 인자했다. 그리고 단아했다.

진해기적의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일, 또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해 주기도 한다며 기적의도서관을 안내해 주셨을 때에는 친근한 마을 할머니의 느낌이었다.

공과 사. 개인과 사회. 이렇게 경계를 짓고 나누어 생각을 해 보곤 했다. 그래서 공공성을 갖는 일, 사회적인 일을 한다 생각하면 개인이 희생하거나 과도한 헌신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공과 사가 조화로운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오래된 의문에 다가서야 할 때인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공적인 일인데 이 과정 중에 사적인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꺼냈다가 곤혹을 치룬 적이 있다. 공과 사를 어떻게 명확하게 나눌 수 있냐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지적에 말을 잇기 곤란했던 어떤 경험이 있다.

개인이 삶의 단위이어야 한다면, 결국 공은 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사들이 모여 공이 되는 것이다. 이 개개별적인 사들의 이익의 충돌을 지혜롭게 조율할 수 있는 원리가 민주주의가 아닐까.

이이효재 선생님은 어떻게 하여 나에게 그런 첫인상을 주셨는지 풀어봐야겠다. 개인은 사회를 통해 구성되고 그 과정에서 본능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구성되기도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왜 선생님한테서는 그런 이상을 받지 않았는가를.

선생님의 장례는 여성장으로 치러졌다. http://www.wsri.or.kr 추모페이지에 가면,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다.

부디 선생님께서 평안히 영면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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