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총 11편의 영화 중 7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계급, 가정, 정규직, 비정규직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들이다. 두 편의 외국의 노동영화가 시장에 선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라면 한국의 영화들은 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같은 노동자, 노동 이야기들이지만 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동시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층층이 쌓여 온, 다른 역사와 문화 위에 서 있는 노동자와 노동문제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계급, 시장, 인간주의

켄 로치의 영화를 보다 보면 홍상수의 영화들은 오히려 사치스럽다. 홍상수의 영화가 보여주는 지질한 일상보다는 켄 로치가 보여주는 계급적 상황들은 너무 절박하고 참담해 보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수많은 '나'들, 그렇지만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런 나 들의 거울이라면, 켄 로치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는 이 시대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크게 다를 바 없는 계급사회적 거울이라 할 만하다. <미안해요, 리키>는 자본주의 삶에 빨려들어 가는 노동자와 그 가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장마철 우수 홀(hole)에 쏜살처럼 빨려들어 가는 장대비 들처럼, 신자유주의 사회의 노동자들도 그렇게 자본주의 노동시장에 빨려들어 가고, 흙탕물로 변해 어딘가로 떠내려간다. 그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러한 노동자의 삶이 더 암울한 이유는, 영국 사회철학자 로이 바스카의 말처럼, 영화 속 리키와 애비같은 노동자의 삶이 의도치 않게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스테판 브리제 감독의 <아버지의 초상>(2015)의 주인공 티에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쟁 체제에 맞닥뜨려, 그 체제에 순응하기보다 차라리 어긋 내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의 원제는<시장의 법칙(La loi du marché)이다. 영어 번역은 <The Measure of a Man>으로 '인간의 척도' 쯤으로 번역될 것 같다.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자신의 가치(가격)을 시장의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높이거나 바꾸어야 한다. 첫 번째 회사에서 노조활동을 이유로 구조조정 당한 티에리는 2년여의 구직 활동 끝에 대형마트의 보안 요원으로 재취업한다. 보안 요원이 하는 일은 cctv를 보면서 마트의 좀도둑을 감시하고 잡아내는 것이다. 마침내 티에리는 마트의 할인 쿠폰을 슬쩍하다 걸린 동료를 적발하게 되고, 추궁하는 지경에 이른다. 동료는 지금까지 성실히 일했다며 용서를 구하나 지점장은 믿을 수 없다며 해고한다. 그렇게 한 명의 동료는 해고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객의 포인트를 자신에게 적립한 동료가 해고되고 그 동료는 자살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불어, 영어, 한국어의 제목 번역을 비교하며 이해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불어 원제 <시장의 법칙>에서 시장의 법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손, 가격인가? 아니! 감독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오히려 영화는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 너희들 상호의 '감시'가 아닐까! 라고 반문하고 있지 않은가! 구조조정도, 실직수당도, 보안 요원도 모두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들의 상호 감시 속에 이루어진다. 인간들이 서로 감시하며 검열하는 것이다. 검열과 감시에 적발되면 자본주의 시장 경쟁 체제에서 너나없이 쫓겨나는 것이다. 감시와 검열은 전체주의의 기본 요소다. 히틀러 치하의 전체주의 사회에서도 그렇고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의 반공주의 체제도 그렇고 모두 감시와 고발의 주된 요소가 사회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이제 자유주의 시장 경쟁 체제도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체주의적 시장 경쟁 체제‘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는지. 반해, 영어 번역은 다소 인간주의적 발상이다. 영어 제목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티에리가, 동료를 추궁하던 방에서 나와 마트를 떠나는 인본주의적 모습을 포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적 시장 경쟁 체제를 어긋 내버리며 떠나는 주인공 티에리의 씁쓸한 모습은 영어 제목처럼 ‘인간의 척도’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면, <아버지의 초상>이라는 한국어 영화명은 어떤가? 이 부분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이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상전의 사회, 노동하는 종

개막작에서 폐막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영화들은 주로 비정규직의 노동을 그렸다. 개막작 <내가 사는 세상> (김장환, 2019)은 20대의 젊은 커플이 기성세대의 선배들에게 피 땀 눈물을 갈취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눈에 띄는 것은 계약이라는 합리성을 거부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계약'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거래 방식이다. 계약은 '약속'의 경제적 개념이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이 개념을 거부한다. 오히려 전근대적인 정서적 의리적 상호 의지체임을 강조하며 사회 초년생들의 노동을 뺏어간다. 오늘날 계약 행위는 주당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의 노동에서도 매우 보편적이며 당연한 방식이 되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가, 작가 등 프리랜서들의 세계에서는 미흡하다고 이 영화는 지적하고 있다.

영화제 마지막 날 부천시청 판타스틱 큐브에서 연속 상영된 세 편의 영화 <보라보라> (김도준, 김미영, 김승화 2020), <언더그라운드> (김정근, 2020), <일하는 여자들>(김한별, 2019) 역시 비정규직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들이다. 앞의 두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시험이라는 절차를 통과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비정규 임시고용직의 차별에 관한 문제다. 시험을 통과해 뽑힌 사람들은 견고하고 안정적인 성(成)을 구축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하기 싫은 위험한 일이나 허드렛일을 처리해 줄 사람들을 따로 뽑는다. 자동차 매연에 노출되어 일하는 톨게이트 여성 수납원들(보라보라),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하철의 어린 노동자들(언더그라운드)이 그런 위험하고 하기 싫은 일들을 담당한다. 여기서 한국 노동영화의 시선과 켄 로치나 스테판 브리제의 영화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켄 로치나 스테판 브리제의 영화를 보다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려는 가족, 인간, 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 영화들은 그 결이 다르다. 계급이라는 사회학적 개념보다는 전근대적인 용어들인 종과 상전이라는 말들이 먼저 떠오른다. 정규직이라는 상전과 비정규직이라는 종! 기성세대라는 상전과 청춘이라는 종! 가부장이라는 상전(남편)과 아내라는 몸종!

김한별 감독의 <일하는 여자들>? 아니! 일하는 몸종들

20대의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일하는 여자들>은 방송 작가들에 대한 다큐다. 영화는 주로 노조를 결성하는데 힘쓴 전 지부장을 쫒아다니며 노조 결성 이유와 그 과정들을 듣는다. 정규직 PD들의 여성 작가들에 대한 갑질이 언급된다. 외국에서는 PD들이 으레껏 하는 일들을 아무런 보수나 대가 없이 시키면 그만이다. 하물며 보수도 구두로 하고, 그것을 파기하는 짓도 그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정규직 PD는 상전이고 여성 작가들은 프리랜서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가진 몸종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일하는 여자들>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대 여성 감독의 시선에 잡혀 있는 것은 의도 여부와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바로 남편과 집안에서의 문제다. <일하는 여자들>의 전 노조 지부장은 남편한테 이해는커녕 지지도 응원도 받지 못한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책임, 퇴근하는 남편을 위한 요리 모두가 그녀의 몫이다. 후배와 가족들이 함께 놀러 간 펜션에서 남편은 말한다. 자기 아내가 이 힘든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남편을 위해 ‘일하는 여자’ 전 지부장은 후배를 집에 초대해 놓고서, 아이를 돌보고, 집까지 들고 온 일에 허둥대다가도 남편의 귀가 전화를 받고 나서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며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자기 남편도 요리를 한다, 그런데 가족을 위한 요리가 아니라 취미를 위한 요리를 즐긴다고!

대체 이 여자는 하루에 몇 시간 자는 걸까? 전 지부장의 집에 초대된 후배의 존경스런 의문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일하는 여자들’의 운명이다.

에필로그

근대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 발전해 온 서구에서 노동자, 가정, 행복, 인간과 관련하여 시장에 선 인간들이 어떻게 비인간주의적으로 발가벗겨지는 지에 대해 철학적 인간적 시선과 질문들을 두 편의 영화(켄 로치, 스테판 브리제)가 담아내고 있는 반면, 나머지 5편의 한국의 노동영화는 유교적 문화에 이입된 한국의 자본주의와 그 노동문제들은 노동자, 여성, 정규직, 비정규직의 양상들에서 다른 시선과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가 시장에서의 인간과 가정의 가치란 무엇일까에 대한 근본적이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후자에서는 차별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나 싶다.

김한별 감독과의 대화
김한별 감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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