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의 예술가 22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 우리 선조들의 도자(陶瓷) 예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닌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에서 국보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의 접두사 ‘막’은, ‘막걸리’, ‘막담배’, ‘막국수’, ‘막말’, ‘막노동’ 등의 예에서처럼 ‘거칠거나 품질이 낮다’, 또는 ‘닥치는 대로 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막사발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에 ‘품질이 낮은 사발’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의 막사발은 결코 품질이 낮은 사발이 아니었다. 막사발은 청자에 하얀 분칠을 한 분청자의 일종으로  중국과 일본에는 없고, 오직 조선에만 있는 독특한 사발이었다. 막사발은 생김새나 문양이 무척이나 자유분방해서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막 만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그릇 모양만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릇에 금이 가면 가는 대로, 옆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놓아두고, 또 밑으로 유약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놓아둔 결과였다.

그렇기에 막사발은 예술품으로서보다는 철저히 생활용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제사 때는 제기(祭器)로, 식사 때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술자리에서는 술잔으로, 그러다 한쪽 귀퉁이라도 깨지면 개밥그릇으로 쓸 만큼 흔하면서도 쓰임새가 다양한 물건이었다.

조선의 막사발, 일본의 국보가 되다

이런 막사발이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정작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였다. 센노리큐(千利休)는 16세기 후반 일본의 다도(茶道)를 정립하여, 사치와 향락에 젖어있던 당시의 차 문화를 수행의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와비’라는 미의식으로 표현되는 센노리큐의 다도는 한마디로 자연 그대로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딱 어울리는 찻잔이 바로 조선의 막사발이었다. 차를 마시는 데 하필 막사발과 같이 큰 그릇이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일본의 전통차가 찻잎을 분말로 만들어서 이것을 풀어 먹는 말차(末茶)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의 막사발 열풍이 불었는데,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가 쓴 『한국 문화 교과서』(소나무, 2011년 5월)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그릇을 일생 하나라도 만들면 여한이 없겠다.”, “이 그릇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기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이 그릇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겠다.” 등과 같은 엄청난 찬사가 쏟아졌으며, 심지어는 신기(神器)라 부르면서 그릇을 모셔놓고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막사발은 자연이 조선 도공의 손을 빌려 만든 작품

한마디로 일본인에게 조선의 막사발은 신앙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기자에몽 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 역시 16세기 무렵, 조선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혼다(本多), 마쯔히라 후마이꼬(松平不昧公) 등을 거쳐 현재는 대덕사(大德寺)라는 절에 보관되어 있다. 이 막사발은 안을 들여다보면 흡사 옹달샘이 솟아나는 듯하다고 해서, 어떤 일본인 학자는 이를 두고 “이런 그릇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이 조선 도공의 손을 빌려 만든 것이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교토 대덕사에 있는 일본 국보 「기자에몽 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
교토 대덕사에 있는 일본 국보 「기자에몽 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

하지만 일본의 이런 열풍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17세기 이후 막사발의 맥이 끊겼다가 근래에 와서야 다시 그 맥을 이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 부천의 예술가 코너에 소개할 작가는, 우리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도자, 막사발의 재현과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는 도예가 이설희이다.

이설희 도예가. 부천 작동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도자 교육과 작품 활동을 겸하고 있다.
이설희 도예가. 부천 작동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도자 교육과 작품 활동을 겸하고 있다.

 

이설희 도예가는 누구?

부천시 작동, 장애인종합복지관 인근에 있는 그녀의 공방 <길도예>에 들어서자 작업실이라기보다는 흡사 아담한 카페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사방 벽에는 지금껏 그녀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들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수강생들의 작품이 완성을 기다리며 빼곡히 늘어서 있다.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자랑하는 수강생들은 공방에 와서 작품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면서 재미있게 놀다 간다. 공방 뒤쪽에는 꽃과 나무로 뒤덮인 마당이 있어서 그냥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공방 내부. 이설희 작가의 손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다.
공방 내부. 이설희 작가의 손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다.

지금껏 25년 이상을 줄곧 부천에서 활동해온 이설희 도예가는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도예과를 졸업했으며, 부천도예가회, 한국도자장신구회, 한국미술협회 회원, 경인미술대전 초대작가, 부천미술협회 이사, 길도예 대표, 도원회 대표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술가답지 않은 수더분한 인상으로 친근감을 주는 이설희 도예가는 지난 2019년 8월, KBS 2TV <생생정보>에 출연해 ‘나만의 그릇 만들기’ 도예 강좌를 진행한 바 있으며, 일본 도쿄 구민회관, 미국 시카고 한인문화회관 등 국내외에서 총 4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7 부천 예총 올해의 작가 운영위원, 2016~2018 부천시 공예체험교육관 관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설희 도예가는 2016~2018 터키 앙카라 하제테페대학교 장작가마 심포지엄 참가, 2019 중국 산둥성 쯔보(淄博) 세계막사발 실크로드 심포지엄 참가 등,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18 터키 앙카라 하제테페대학교 장작가마 심포지엄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2018 터키 앙카라 하제테페대학교 장작가마 심포지엄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2019 중국 산둥성 쯔보 세계 막사발 실크로드 심포지엄 참가작.
2019 중국 산둥성 쯔보 세계 막사발 실크로드 심포지엄 참가작.

 

“터키 앙카라, 중국 산둥성 쯔보 등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도예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도자 예술의 세계적인 흐름도 파악하고, 또 외국 작가들에게 우리 고유의 장작가마라든가, 막사발 제작 기법 등을 소개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올해도 해외 심포지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되고 말았네요.”

이설희 도예가의 작품 세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쪽 벽면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주전자 모양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가 주전자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다. 그런데 모양이 좀 독특하다. 마징가Z를 닮은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원통형 장작 난로를, 또 어떤 것은 기관단총을 든 병정을 닮았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본래 하나인 몸체를 여러 개의 단면으로 절개했다가 다시 이어 붙여서 그런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억지로 붙여놓은 것처럼 불안정하고 어색하다. 괜스레 이상한 긴장감이 감돈다. 무슨 의미일까? 작가의 설명이 듣고 싶어지는 찰나, 벌써 눈치를 챘는지 그녀가 먼저 질문을 던진다.

이설희 작가의 주 종목인 주전자 연작.
이설희 작가의 주 종목인 주전자 연작.

“뭐라고 제목을 붙이시겠어요?”

“글쎄요…….”

대충 얼버무리고 나서 서둘러 공방을 빠져나오는데 자꾸만 주전자의 모습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혹시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의 갈등을 형상화한 작품인가요? 가정에서도 부부간, 부모·자식 간에 서로 갈등과 반목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가족이라는 하나의 틀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말이에요. 그렇다면 <갈등>이라는 제목은 어때요? 아니라고요? 흠, 그럼 혹시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을 표현한 건가요? 내 안에는 천사 같은 나도 있고, 악마 같은 나도 있고, 아무튼 여러 가지 모습의 내가 있으니까요.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요. 그렇다면 제목을 <나>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그것도 아니라고요? 그럼…….”

이설희 도예가는 내년(2021) 5월, 심곡천 네모갤러리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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