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인문기행

인공의 길에 갇힌 세상은 화려하기는 해도 아름답지는 않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도 비슷한 거리, 비슷한 건물, 비슷한 음식 일색이다. 소위 말하는 지방색이라는 게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만 해도 불과 150여 년 전, 조선의 선비들은 물론 외국인들마저 감탄했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우리 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현해당의 인문기행, 이번 회에는 비록 온전하지는 않으나 그나마 남아있는 조선 최고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아름다움을 소개한다.

1802년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의 눈에 비친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총 길이 18.68개의 성문을 지녔으며 평균 높이는 5~8m이다.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서기 1396(태조 5),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1899년 전차선로를 설치하기 위해 성곽의 일부가 헐린 이후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리고 말았다. 19681·21 사태 직후 중건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전체 구간의 70%, 13.7km(2020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된 상태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는 그의 만경재기(萬景齋記)에서 한양도성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임술년(1802, 순조 2)에 영남에서 돌아와 도성 서대문이 바라다보이는 서쪽 언덕에 거처를 정하였다. 내가 기거하는 집의 동쪽 방문은 성의 서쪽 초루(譙樓)와 마주하고 있는데 지대가 높아 도성 안의 수많은 집들이며 여러 정자와 누대가 꽃과 버들 사이로 어른거리는 모습과 온갖 수레와 말들이 오가는 모습들을 굽어볼 수 있다.

한 줄기 성가퀴가 남쪽 목멱산(木覓山)으로부터 북쪽 인왕산(仁王山)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크고 작은 나무들이 성 위로 드러나 있어 마치 뿌리가 없는 듯하고, 제멋대로 늘어서서 형형색색의 자태를 연출하고 있다. 어떤 것은 구름이 낀 것처럼 울창하고, 어떤 것은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우뚝하고, 어떤 것은 황제의 일산(日傘)처럼 무성한 잎을 드리웠고, 어떤 것은 창을 세워놓은 것처럼 우뚝 솟아있고, 어떤 것은 일부러 조각한 것처럼 삐뚤빼뚤하며, 어떤 것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처럼 생기가 있다.

까치들은 여기저기 둥지를 틀고 새들은 서로 희롱하며 즐긴다. 푸르른 나뭇잎들은 다투어 교태를 뽐내고 꽃들은 여기저기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석양에는 자줏빛으로 물들고 한겨울의 눈 속에서는 흰색으로 변한다. 안개가 끼면 꿈속을 노니는 듯하고, 날이 개면 막 세수하고 빗질한 여인의 모습처럼 청아하다. 큰 나무, 작은 나무, 굽은 나무, 곧은 나무 할 것 없이 저마다 기이함을 이루고 성긴 나무, 빽빽한 나무, 짝지어 선 나무, 홀로 선 나무 할 것 없이 모두가 절묘함을 이루었다.

흡사 커다란 그림 병풍을 허공에 활짝 펼쳐놓은 것 같으니, 매번 문을 열고 그것들을 볼 때마다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날이 장차 저무는 줄도 모른다.

윤기는 조선 숙종, 영조 연간의 실학자로 성호 이익(李瀷)을 사사했으며, 1773(영조 4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20년 동안 학문을 연구하였다. 1792(정조 1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초사(初仕)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예조·병조·이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남포현감(藍浦縣監황산찰방(黃山察訪)을 역임하였다. 이후 다시 중앙에 와서 정조실록의 편찬관을 역임하였으며 벼슬이 호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무명자집(無名子集)2020책이 있다. 이 글은 저자가 황산찰방을 역임한 후 서울로 돌아와 쓴 글이다. 황산은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 일원이다.

1884년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의 눈에 비친 한양도성

한편, 1883~1884년에 걸쳐 한국을 여행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1886년에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서울 성벽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서울의 성곽은 그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지만 성벽이 놓인 위치와 지형을 고려하면 세상에 그 짝을 찾기가 어렵다. 험난한 지형에 성벽을 축조함에 있어 그 어려움은 무시되었고 높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성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바라보면 이 성곽은 가장 놀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남대문에서 시작한 성곽은 서서히 산꼭대기를 향하여 기어 올라가는가 하면 불규칙한 산 정상의 지형을 따라 살짝 가라앉다가 다시 솟아오른다.

어떤 순간에는 가까이 있는 산자락에 가려 성곽이 사라지는가 하면 어느 순간엔가 다시 더 높은 산 능선을 따라 눈앞에 나타난다. 성곽은 정점에서 더 올라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정상의 협곡을 향하여 내려와서 동북쪽 성문과 이어지는가 하면, 닭벼슬 모양의 정점을 향하여 다시 숨 가쁘게 올라가기 시작한다.

성벽은 여기서 다시 산의 안팎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며 산과 성벽이 하나로 될 때까지 숨었는가 하면 또다시 나타나곤 한다.

성곽은 마치 거대한 똬리를 틀고 나른하게 졸고 있는 거대한 구렁이 같이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정상으로 치솟아 올라가는가 하면 더 올라갈 수 없는 계곡에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온다. (짐 앳킨스 지음, 조성중 옮김. 당당한 서울의 성문중에서 인용)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 ~1916)은 미국의 천문학자로 보스턴의 로웰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동생 애보트 로런스 로웰과 에이미 로웰이 있다. 부유한 집안이었던 로웰은 187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상류 사교계의 생활을 즐기다가 1880년대에 극동에 대한 호기심에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1883, 고종은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는데, 보빙사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미국 공사의 파견에 대한 답례로 조선이 18837월 민영익을 대표로 미국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을 말한다. 보빙사가 715일 출항하여 일본에 들렀을 때,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로웰과 그 비서 미야오카가 동행한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린다. 로웰은 홍영식과의 친분으로 조선에서 국빈 대접을 받고 사진사와 동행해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카메라 앞에 선 조선의 여인을 찍기도 했다.

맑은 날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사진 중앙에 대남문, 좌하에 문수사, 뒤쪽에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가 우뚝 솟아있다.(사진 출처 북한산국립공원)
맑은 날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사진 중앙에 대남문, 좌하에 문수사, 뒤쪽에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가 우뚝 솟아있다.(사진 출처 북한산국립공원)

1889, 샤일레 롱, 찰스의 눈에 비친 북한산성

샤일레 롱, 찰스(Chaillé-Long, Charles, 1842~1917)는 프랑스계 미국인이자 군인이며 아프리카 탐험가이고 작가이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후, 1869C.G.고든 장군이 이끄는 부대의 일원으로 이집트로 파견된다. 이후 샤일레 롱은 빅토리아호와 나일강을 탐험하고 미국 지리 학회의 메달을 수상한다. 1875년에는 나일강 서쪽 수단 남부의 바르 알 가잘 지역을 횡단한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컬럼비아 로스쿨을 졸업하고 1887년부터 1889년까지 조선 내 공사관에서 비서와 총영사를 맡는다.

영어로 된 그의 여행기로는 세 명의 예언자(1884), 4대륙에서의 삶(1912), 중앙아프리카 : 벌거벗은 사람들의 벌거벗은 진실(1876) 등이 있으며, 프랑스어로 쓴 글 중에는 나일강의 원류(1891), 이집트의 오지들(1892), 코레 혹은 조선(1894) 등이 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퀘파르트 섬(제주도)의 과학 탐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외부대신 조병식의 초청으로 1889511일부터 3일간 북한산성을 방문한다. 조병식은 동학농민운동을 촉발케 한 조병갑의 사촌으로 구한말의 대표적인 탐관오리이다. 비로 인해 제대로 된 일정을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이 여행을 통해서 그가 남긴 몇 장의 사진과 글은 당시 북한산성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성가퀴가 인공구조물이면서도 인공적이지 않다. 보현봉은 출입통제 구역으로 여기에 올린 사진들은 북한산국립공원 관리공단의 허락을 얻어 촬영한 것이다.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성가퀴가 인공구조물이면서도 인공적이지 않다. 보현봉은 출입통제 구역으로 여기에 올린 사진들은 북한산국립공원 관리공단의 허락을 얻어 촬영한 것이다.

코스는 창의문 동령폭포 은자의 기도처 - 롱 앤 에스(Long & S) 마운틴 -뾰족한 봉우리 - 대남문 - 중흥사(1) - 중흥사(2) - 비석거리 - 대서문 중흥사 대남문 창의문 순이다. 비록, 북한산성을 이태조가 축성했다거나, 산성 내 사찰 건축 당시가 불교의 융성기였다는 식의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북한산성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첫째, 북악의 뒤쪽은 매우 가파른 산들이 모여있고, 하나씩 서로 겹쳐서 누워있다. 그 봉우리들은 마치 왕관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국왕의 퇴각지인 북한 성곽을 이루어 침입할 수 없는 벽을 만든다.

둘째, 성곽은 거대한 뱀이 산 능선을 따라 이 봉에서 저 봉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산기슭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가기도 하며 거대한 코일인 듯 하나로 엮어져 있는 듯하다.

셋째, 산성 안에는 거대한 곡물창고가 있으며, 그 안에 매년 거대한 양의 쌀을 비축 중이다.

넷째, 오백 년 전에나 유효하였을 무기들을 병기고에 보관하고 있다.

다섯째, 승려들이 산성에 세워진 초소를 지키며, 국가는 그들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하고 절을 보수해주기도 한다.

여섯째, 북한산성에는 13개의 문이 있다. 그 문들은 아주 크거나 정교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 방식대로의 아주 훌륭한 건축물이며 이 거대하고 놀라운 성벽의 아주 중요한 통로이자 대문이다.

보현봉에서 바라본 문수사.
보현봉에서 바라본 문수사.

무명자 윤기, 퍼시벌 로웰, 그리고 샤일레 롱, 찰스 모두가 극찬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자연과의 조화 또는 합일을 추구하는 한국 건축의 미학에 해답이 있다고 하겠다. 중국의 건축처럼 규모가 크지도 않고, 일본의 건축처럼 섬세하지도 않지만, 한국의 건축은 어디까지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작위적이지 않으며 자연 친화적인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일부 복원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우리 건축의 멋과 맛을 되살리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기사는 월간 사람과 산 12월 호에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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