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인문기행

‘백세청풍’ 바위글씨. 중국 송나라 때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글씨다. (사진 류백현)
‘백세청풍’ 바위글씨. 중국 송나라 때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글씨다. (사진 류백현)

청풍계, 윤동주 언덕을 넘어 북악으로

인왕산 아래 청운초등학교 옆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멋진 필체의 백세청풍바위글씨가 나온다. 예전에 청풍계(淸楓溪)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곳은 인왕산 동록의 한 선경(仙境)으로 일찍이 선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터를 잡고 별장을 이룬 곳이다. 김상용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형이며,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 김상용, 김상헌 형제는 유명한 안동김씨 장동김문(壯洞金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金壽增),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과 육창(六昌)이라 불리는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을 거치면서 장동김문은 조선조 최고의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창풍계 상류의 난가곡. 계곡을 가로질러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다.(사진 류백현)
창풍계 상류의 난가곡. 계곡을 가로질러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다.(사진 류백현)

당시 청풍계의 모습이 겸재 정선의 화첩에 남아있는데 고급 주택이 즐비한 지금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르다. 한편 백세청풍바위글씨는 흔히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송나라 때의 학자인 주희(朱熹)의 것이다. 동야 김양근(金養根, 1734~1799)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늠연사(凜然祠)는 선원 김상용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늠연사 앞 바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우암 송 선생의 글씨다. 천유대(天遊臺)는 회심대(會心臺) 위에 있으며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자연히 대()를 이루었다. 일명 빙허대(憑虛臺)라고도 하며, 한 구역의 빼어난 경치가 모두 이곳에 모였다. 벽면에 주부자(朱夫子)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어서 일명 청풍대(淸風臺)로도 불린다.”

난가곡을 가로질러 설치된 구름다리.(사진 류백현)
난가곡을 가로질러 설치된 구름다리.(사진 류백현)
자하문.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있는 한양도성의 북서문으로 창의문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세운 것으로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보물 제1881호..(사진 류백현)
자하문.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있는 한양도성의 북서문으로 창의문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세운 것으로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보물 제1881호..(사진 류백현)

청풍계 상류, 난가곡(爛柯谷)에는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걷는 재미를 더한다. 속칭 이빨바위를 지나 윤동주 언덕에 오르자 멀리 북한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다.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었다. 바람길을 피해 언덕 남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어야 했건만, 잠시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죄다.

윤동주문학관은 코로나19로 인해 폐관, 자하문을 지나 곧장 북악산 성곽길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해발 342m의 높지 않은 산인데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흡사 시지포스의 바위산을 연상케 한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인간 세상의 온갖 상념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무겁기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나도 신선처럼 가벼이 이산 저산을 주유할 수 있을 것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에 서자 그 옛날 허도사가 단약(丹藥)을 구웠다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 발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북악산 성곽길에서 비리본 북한산. 오른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사진 류백현)
북악산 성곽길에서 비리본 북한산. 오른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사진 류백현)
북악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한양도성.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사진 류백현)
북악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한양도성.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사진 류백현)

백석정의 주인 허진인(許眞人)은 누구인가?

다시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를 지나 최근에 새로 개방된 북측 탐방로를 따라 내려오니 어느덧 청운대 안내소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받은 출입증을 반납하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백사실 계곡으로 접어들자 크고 작은 바위가 암반을 이루고 그 위로 거대한 뱀이 구불구불 기어가는 듯한 계류(溪流)가 예사롭지 않다. ‘백사실이라는 명칭은 한자어 백석곡(白石谷)’의 변형으로 계곡 안에는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 등의 바위글씨와 함께 백석정(白石亭)’의 옛터가 남아있다. 백석정은 누가 언제 세운 것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추사 김정희의 시에 예전에 선인(仙人)‘의 백석정을 매입했는데, 당시에는 터만 남이 있었다.”라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추사 김정희가 이 백석정의 주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전의 주인인 선인(仙人)에 대해서는 옛사람들의 기록에 허진인(許眞人), 허도사(許道士), 허씨(許氏) 등의 명칭만 보일뿐,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백사실계곡 상류. 백사실계곡은 도롱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사진 류백현)
백사실계곡 상류. 백사실계곡은 도롱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사진 류백현)

()통의도시연구소 최종현 소장은 2014년에 발표한 논문 백석정 별서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에서, 허진인이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연객(煙客) 허필(許佖, 17091768)이라는 주장을 내놓아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허필은 시에 능통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남다른 재주를 지녀 삼절(三絶)이라 불린 인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강세황, 이용휴, 이병휴, 이광려 등 주로 안산지역의 학사들과 교유했으며,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으나 맘에 드는 골동품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바꾸고, 절친한 벗 이용휴에게 자신의 생지명(生誌銘, 산사람의 묘비명)을 받을 정도의 기인이기도 했다. 그는 북한산에 관한 시집을 내기도 했고, 또 백사실 계곡 아래 세검정(洗劍亭)에서 최성대(崔成大), 임정(任珽), 강세황(姜世晃) 25명과 함께 시회를 열기도 했다.

‘백석동천’ 바위글씨.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다.
‘백석동천’ 바위글씨. 누가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다.

최종현 소장이 허필을 허진인으로 단정한 결정적 이유는 허필의 시 북한산 남쪽 백석 별업에서 정윤, 강세황과 함께 짓다(漢南白石別業與鄭運德潤及豹菴, 同賦)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북한산 남쪽’, ‘백석별업등은 누가 봐도 허필을 백석정 주인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도 인정한 바다.

백석동천의 사랑채 유구. 건축 시기는 1830년대로 추정되며 ㄱ자 5량(五樑)집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가 높았으나 1970년경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사랑채 북쪽에 안채가 있었다. (사진 류백현)
백석동천의 사랑채 유구. 건축 시기는 1830년대로 추정되며 ㄱ자 5량(五樑)집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가 높았으나 1970년경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사랑채 북쪽에 안채가 있었다. (사진 류백현)

한남(漢南)은 북한산 남쪽이 아니라 한강 남쪽이다

하지만 여기에 딴지를 건 인물이 있으니, 다름 아닌 한국산서회 인문산행 팀의 조장빈 이사다. 조 이사는 최 소장이 한남(漢南)을 북한산 남쪽으로 본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한남은 북한산 남쪽이 아니라 한강 남쪽을 뜻하며, 백석별업은 오늘날 서울 강남의 법원단지가 위치해 있는, 당시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과천현 백석동이라고 주장한다. 그 백석동에 있는 친구 정윤(鄭潤)의 별업에서 강세황과 함께 지은 시라는 것이다.

백석정 유구와 연못. (사진 류백현)
백석정 유구와 연못. (사진 류백현)

허필이 주로 안산을 기반으로 활동했고, 살림살이가 가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멀리 북악산 자락에 굳이 별업을 소유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허필의 면면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부분도 많다. 혜환 이용휴가 쓴 그의 생지명(生誌銘), “내가 밖에서 안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내 김씨가 있기 때문이고, 안에서 밖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들 점()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아내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바위글씨 '월암', 백석정 서쪽 산봉우리에 있다.(사진 류백현)
바위글씨 '월암', 백석정 서쪽 산봉우리에 있다.(사진 류백현)

그 아내의 가계를 추적해보니 아버지가 무안현감, 양산현감 등을 지내고 정언(正言)을 거쳐 사간·집의(執義)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한 학고(鶴皐) 김이만(金履萬)이다. 평생을 관직에 있었으니 재력도 있었을 것이고 더구나 김이만이 누구인가? 그는 팔도의 명승을 두루 돌아보고 산사(山史)라는 글을 남길만큼 명산대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는 북한산을 세 번이나 올랐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월출산, 무등산 등 팔도의 명승을 두루 섭렵했다. 그런 장인의 풍류를 곁에서 지켜본 허필이니, 백석동에 작은 초막(草幕) 하나 마련하지 못했으랴? 라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연객 하필의 글씨. (사진 출처 서울 옥션)
연객 하필의 글씨. (사진 출처 서울 옥션)

조장빈 이사의 말을 들으면 조장빈 이사의 말이 맞는 것 같고, 최 소장의 글을 보면 최 소장의 글 또한 맞는 것 같다. 뭔가 결정적 증거가 나오기까지 상당 기간, 서로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릴 것 같다. 이럴 때 옛날, 북한산성을 돌아보고 중흥유기(重興遊記)라는 글을 남긴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 1760~1815)이 있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으리라.

허필이어도 좋고, 허필이 아니어도 좋네!

좋네, 좋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좋네!”

백석정 서쪽 산마루에 새겨진 월암(月巖)’ 바위 글씨를 감상하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어느덧 현통사 대웅전 추녀가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밤이 깊으면 동령폭포의 상쾌한 물소리가 무자경(無字經)을 설하리라.

백사실계곡 초입의 삼각산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초입의 삼각산 현통사(玄通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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