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 인천에서 지인 집안 혼사가 있었다. 그래 가는 김에 계양산을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했다. 관악산과 함께 김포공항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기준점. 대한항공 다니던 젊은 시절 매일같이 쳐다보며  ''언제 한 번 가봐야지.' 했던 대상이었다.

인천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1호선 전철 계산역에 내리니 북쪽에 바로 산이 보였다. 그런데 중턱부터 나무가 거의 없는 대머리 산. 산성이 있다더니 바로 저것인가 싶었다.

지루한 계단 길 끝에 만난 성은 뜻밖에도 아주 훌륭한, 나의 기준으로는 국보급이었다. 해발 230m 높이의, 둘레가 1,180m나 되는 사령부급 대성(大城)이었으며 높이 7m에 문 터가 셋, 치성(雉城)도 넷이나 있는 굉장한 유적이었다. 성안에서는 주부토(主夫吐)’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도 여럿 나왔다고 했다.

 

계양산성 조감도.
계양산성 조감도.

 

계양산성은 어느 나라의 산성이었을까?

그럼, 여기가 고구려성? 삼국사기》 「지리지, "장제군(長堤郡)은 본디 고구려 주부토군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고려]의 수주(樹州)이다."라고 했으니까. 수주는 이후 부천이 되었으니 나무 수자 수주와 부천의 시화(市花) 복숭아나무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원래는 백제 땅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제 초기에는 미추홀(彌鄒忽)이나 매소홀(買召忽)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소성현(邵城縣), 고려 때는 인주(仁州)로 바뀐 이 땅 인천의 일부였을 테니까. 이 일대는 서울의 아차산성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백제였는데 중간에 고구려령이 되었다가 이윽고 신라 차지가 되는 국적 변동을 거쳤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나중에 계양산성 박물관에서 본 유물 중에는 바닥은 둥글고 목이 짧은 원저단경호(圓低短頸壺), 목간(木簡) 같은 백제 계통의 것들도 있었고 성벽 기저부(基底部)는 또 백제식의 토석혼축(土石混築)이어서 일반적으로 백제인들이 처음 쌓았으리라고 본단다. 그러다 서기 475,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백제 수도 한성이 함락되면서 한강 이북이 고구려령이 될 때 국적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계양산성 서 벽.
계양산성 서 벽.

 

삼국의 축성 양식 혼합된 계양산성

이후 고구려인들은 여기 계양산성을 자기들식으로 다시 쌓았을 것 같다. 안내판에 얼핏 보이는 네 개의 치성(雉城). 발굴 보고서에서는 아홉 개쯤 됐으리라 추정하는 돌출부들이다. 아직도 원래 모습 그대로인, 바른층쌓기로 가지런히 쌓인 성벽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안내문에 보면 주변에서 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축성했다.”라고 했는데 어처구니도 이런 어처구니가 없다. 395m의 계양산 정상이 여기보다 165m 더 높은 까닭에 저런 소리를 했겠는데아차산성이 있는 용마산 정상에서 성안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양산성은 안을 들여다볼 고지가 한 군데도 없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 안내문의 필자는 와보지도 않고 성이란 모름지기 주변에 안을 넘겨다볼 수 있는 높은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고릿적 이야기를 늘어 놓았던 것이다.

건물지가 여럿 발견된 북문 일대는 성안 쪽이 ㄱ자로 굽어져 있다. 소위 왜성(倭城) 양식인바 임진왜란 때 여기 주둔했던 왜군들이 저들 식으로 고친 것이다. 그때 왜군들은 칠천량 해전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제 나라 수군이 울돌목을 돌아 인천 앞바다에 배를 댈 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다.

계양산성이 수축될 무렵의 고구려 국경은 미추홀이 있었으리라 여겨지는 저 문학산성, 그 너머 월곶에서 안양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산릉을 따르다가 이후 한남정맥을 타면서 동쪽의 의왕 백운산, 북진하여 청계산 이수봉, 서진하여 과천 남쪽 응봉, 그리고 북쪽의 관악산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 바깥은 초기에는 모두 백제였을 텐데 552년 신라가 한성 일대를 차지한 뒤로는 백운산에서 관악산 저쪽이 신라 땅이 되었으니 이 무렵 고구려가 백제와 국경을 맞댄 부분은 월곶에서 백운산까지였다 하겠다. 나아가 백운산은 세 나라 국경이 만나는 삼각뿔의 꼭짓점이었다.

 

계양산성 북벽. 덤불로 가려진 부분에 북문이 있다.
계양산성 북벽. 덤불로 가려진 부분에 북문이 있다.

 

계양산성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현재진행형

성벽 서쪽 끝자락을 지나 방송국 송신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도중 만나는 두 개의 토치카가 뻘로 보이지 않는다. “군관민으로 시작되던 권위주의 시절 1번 타자 군인들의 저 흔적과 위치가 고대 토치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이 일곱 개의 보루 성의 끝, 최고 높이 용마봉 보루 성에서 북쪽 정황을 살필 수 있었던 것처럼 여기 계양산성도 첫 토치카, 두 번째 토치카정상 토치카 이렇게 관측초소(OP)와 중간 보루(GP)들을 구축하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계양산 마루에 서니 서쪽으로 영종대교와 바다가 보인다. 서북쪽으로는 김포 장릉산, 대곶 수안산, 월곶 문수산도 가늠된다. 여기에 하성[]이 끼면 주부토군의 네 속현이 채워지는바 각각 장릉산성, 수안산성, 문수산성, 동성산성의 유적으로 고구려의 방어진을 가늠하게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철마산, 원적산, 성주산의 호()를 그리며 계양구와 부평구의 서쪽 울타리를 이루던 한남정맥이 소사본동 남쪽의 할미산에서부터 다시 직선으로, 동남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부천은 바로 저 활꼴 지형 안통과, 할미산에서 북동 북진하는 수영산~우장산~궁산 능선 사이 들판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흐르는 굴포천 범람원, 질척질척한 펄 땅을 간척하면서 주부토군을 설치했던 까닭에 혹자는 주부토를 긴 보, 다시 말해 줄 보를 쌓아 둑을 만든 땅이라는 뜻의 줄보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간척사업은 일이백 년 사이에 끝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마무리는 조선 중기쯤이었을 테니 소사라는 지명이 생긴 건 그 결과 생긴 넓은 들 때문이었지 않을까 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 소사평(素沙坪) 전투의 현장이 바로 지금 평택시 소사동. 부챗살처럼 퍼진 안성천 하류 널따란 갯벌을 간척한 땅이었음을 생각하면.

 

계양산성 박물관에 있는 복원 조감도.
계양산성 박물관에 있는 복원 조감도.

 

계양산에서 바라본 부천의 어제와 오늘

부천이라는 이름은 일제가 부군면(府郡面) 통합을 하던 1914평군과, 부의 비()도시지역을 합해 만든 부천군에서 비롯했다. 이후 1968년 계양 지역이 인천 북구로 편입되면서 잘려 나갔고 1973년 행정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때 부천시로 승격했지만 고려 시대 계양도호부나 조선 시대 부평도호부의 중심이었던 계산동 일대가 시역(市域) 안에 없고 이름 또한 저 인천과 부평에서 따온 헛껍데기니 이 도시는 그 정체성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허랑한 마음에 동쪽을 내려다보니 비행기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는 김포공항이 눈에 들어온다. 동남쪽 멀리로는 비행기들이 끊임없이 떠오고 가는 관악산도 보인다.

관악산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저 삼성산에는 호암산성이 있다. 325m의 중산(中山) 봉우리를 둘러싼 1,250m의 테뫼식 산성으로 이 계양산성의 맞수였다 할 것이다. 저기가 백제였을 때는 백제군이 지키고 있었고 신라였을 때는 신라군이 왔다 갔다 했을.

계양산성은 여기저기 계양산성의 역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할 때 뺏긴 것이 아니라, 642,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 당항성(唐項城)을 뺏으려고 할 때까지는 고구려 영역이었을 것이다. 남양 반도의 당성(唐城)과 장항구(獐項口)를 아우른 그 고을은 원래 백제 영역이었는데 신라가 어느 사이엔가 뺏어 대당(對唐) 통로로 사용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협공해 탈취하려 했었다(실현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613년 수나라가 쳐들어온 틈을 타 신라가 영서지방 500리 땅을 뺏어갈 때나 629년 김유신이 낭비성 싸움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임진강 이남 지역을 차지했을 때도 여기 한강 서쪽의 인천, 부천, 김포, 대곶, 월곶은 의연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계양산성 남벽 바른층쌓기를 잘 보여주는 부분. 바른층쌓기는 삼국의 축성 방식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계양산성 남벽 바른층쌓기를 잘 보여주는 부분. 바른층쌓기는 삼국의 축성 방식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글쓴이 박기성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월간 <사람과 산> 편집장을 역임했다. 인문 지리 탐사 모임인 <와운루계회(臥雲樓溪會)> 좌상이며, 저서로는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책만드는집, 20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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