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OPLE 4 - 자연주의 시인 문신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직선거리로 75km, 쾌속선으로 한 시간쯤 거리에 천혜의 섬, 덕적도가 있다.

인근에 자월도, 대이작도, 소이작도 등을 접하고 있으면서 소야도, 문갑도, 선갑도, 굴업도, 선미도, 백아도, 울도 등을 거느린 이른바 덕적군도(德積群島)의 맹주이다.

예로부터 덕적도는 물이 많고 모래가 풍부하며 소나무가 무성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섬에서 해산물 빼고 귀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중에도 물은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어서 그 귀함이 금은보화를 넘어선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 덕적도(德積島)는 덕물도(德物島), 덕물도(德勿島), 득물도(得勿島)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는 ‘큰물 섬’, 또는 물을 얻는 섬으로 풀이된다. ‘()’크다라는 뜻이고, ‘()’()’은 우리말 []’의 한자 표기이다. 그만큼 물이 중심이고 물이 으뜸인 섬이다.

덕적도는 예로부터 해상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부터 한양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 효종 때 처음으로 둔영을 설치하고 수군만호를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덕적도는 서해안 어업의 전진기지였다. 1970년대 초까지 민어 파시(波市)가 성황을 이루면서 섬에는 사람과 돈이 넘쳐났다. 하지만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파시가 열리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떠나고 옛날의 흥성거림은 추억으로 남았다. 한때 35천여 명에 달했던 덕적면 인구가 지금은 2천여 명으로 줄었다. 어족자원 고갈은 해양 오염과 대형선단의 무차별적인 물고기 포획이 주된 원인이지만, 덕적도 인근 해상에서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모래 채취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30년 동안 경기만 옹진군 일대에서 채취한 모래는 그 양이 약 3억만에 이른다. 과도한 모래 채취는 어족자원 고갈과 인구 감소는 물론이고 덕적도의 아름다운 자연까지 파괴해 한때 국민관광지로 명성이 높았던 서포리해수욕장도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아무쪼록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던 덕적도가 옛 영화를 회복하여 경기만 일대 최고의 명품 섬으로 우뚝 서기를 고대하며오늘은 덕적도 출신으로 부천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문신진 시인을 「더 피플」의 네 번째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부천시 원미구 원미공원에서 만난 문신진 시인.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다.
부천시 원미구 원미공원에서 만난 문신진 시인.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다.

안녕하십니까? 콩나물신문 더 피플입니다. 덕적도 출신 시인으로서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남다르신데, 고향 자랑 좀 해주세요.

덕적도의 드넓은 바다와 파도 소리, 아름다운 자연은 제 삶의 원천입니다. 저는 덕적도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포함한 인생의 전반기를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아직 형님이 살고 계시고 선영이 그곳에 있으니 언제나 그립고 달려가고 싶은 곳이죠. 또 언젠가는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고요. 어린 시절에는 가난과 외로움에 묻힌 섬 생활을 원망도 많이 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아늑한 품속처럼 고향이 소중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몇 년 전에 아내와 아이들 손자까지 11명의 대식구를 이끌고 고향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북리행 마을버스를 타고 이개 정류장에 내려서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손자들의 배꼽 인사를 받으시는 형님을 뵀을 때는 괜스레 눈물이 나더군요. 아버님, 어머님 묘소에 큰절을 올릴 때는 하늘의 별이 되어서 우리 후손들을 지켜보실 그 한없는 은덕에 마음이 숙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살아계셨더라면 올망졸망한 증손자들의 재롱에 기뻐하셨을 텐데.

꼭 저명한 인사가 아니더라도 나름 덕적도 출신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또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이런 게 바로 금의환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지난 2015년 덕적도 서포리 삼림욕장 산책로에 세워진 문신진 시인 시비(詩碑).
지난 2015년 덕적도 서포리 삼림욕장 산책로에 세워진 문신진 시인 시비(詩碑).

덕적도에서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요? 글 잘 쓰고 성격도 활발한 모범생이었을 것 같은데 젊은 시절 얘기 좀 해주세요.

학창 시절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문예반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글 잘 쓴다고 선생님들께 칭찬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죠. 돌이켜 보면 학창 시절에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평생 제 시의 원천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이라는 고립성 때문에 좀 답답하게 느낀 적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제 고향만큼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곳도 없더군요. 아마도 제 시 중 8할 이상은 모두 덕적도와 관련된 것들일 겁니다.

군 복무 시절에는 전우신문이라고 육해공군 병사들이 다 볼 수 있는 신문이 있었는데 거기에 응모해서 여러 번 당선되었습니다. 사단장 표창과 특별 포상휴가 45일도 받았죠. 또 글 잘 쓰는 병사로 소문이 나서 상사들은 물론이고 동료들 연애편지까지 많이 써줬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모르는 병사들도 더러 있었는데, 제대할 때 후임자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편지 교본을 만들어 놓고 나온 기억이 납니다.

2019년 복사골시낭송회 송년콘서트를 마친 후 회원들과 함께.
2019년 복사골시낭송회 송년콘서트를 마친 후 회원들과 함께.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하셨고 공로를 인정받아 퇴직할 때 옥조근정훈장을 수상하신 것으로 아는데 부천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또 부천에서 지금껏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군 전역 후 모교에 복직하여 근무하다가 1988, 부천북초등학교로 발령받아 우연히 선생님들의 문학동아리에 합류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쓰고 발표하면서 언론매체에도 소개되기 시작했죠. 작품 활동 폭을 넓히면서 복사골문학회 사무국장, 라온제나 기획이사, 부천예술포럼 대외협력국장 등을 맡아 지역 문학 발전을 위해 일조를 했고, 자유문학 신인상, 3회 부천신인문학상, 창세문학 특별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콩나물신문과도 인연이 각별한데, 지난 2016년에는 콩나물신문의 <십오야토크쇼>에서 문신진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법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9년에는 그간의 시 117편을 모아 첫 시집 바람의 자유를 출간했어요.

문신진 시인의 시 「침묵의 먹염」 배경인 덕적 무인도 먹염.
문신진 시인의 시 「침묵의 먹염」 배경인 덕적 무인도 먹염.

어느덧 인터뷰를 마칠 시간입니다. 현재 부천문인협회 회원으로 또 복사골시낭송예술협회 고문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계시는데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현재는 부천문인협회 회원이자 복사골시낭송예술협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시인뿐 아니라 시낭송가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낭송은 내 안에 잠재된 감정을 소리와 동작과 표정을 통해 표현할 수 있기에 시 창작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콩나물신문 독자들께도 시낭송가가 되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저는 평생 바다를 품에 안고 살아왔기에 머지않아 다시 고향 덕적도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고향 덕적도에 가서는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에 관한 시를 쓸 것입니다. 또한 먼바다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리움과 외로움의 언어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릴 겁니다. 그 언어들이 쌓이고 쌓이면 또 한 권의 시집이 나오겠지요.

여력이 된다면 고향 덕적도에 문학회를 창설하여 후배들에게 문학의 기초를 마련해주고 싶은 소망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교 교정에 제 시비(詩碑) 하나쯤 세워주지 않을까요?

 

이주희 작가의 THE PEOPLE 4
이주희 작가의 THE PEOPL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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