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베르네천 풍경. 베르네천은 7호선 까치울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4월의 베르네천 풍경. 베르네천은 7호선 까치울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계절이 자꾸만 야위어 간다. 아침을 여는 시간. 아직 어둑새벽이다. 산책길에 나섰다. 찬 기운이 스며든 바람결에 나무 이파리들이 오소소 떨어지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침 일찍 먹이를 찾던 새들의 분주함도 가을이 되면서 느긋해졌는지 소란스럽지가 않다. 베르네천에 물안개가 나지막하게 피어오르더니 슬그머니 계절을 품에 안고 있다. 가을은 유난히 마음 자락에 밟히는 것들이 많은 계절이다.

여명의 시간. 간밤에 기온이 내려갔는지 풀잎마다 하얗게 서리를 이고 있다. 뭉뭉한 안개가 서서히 풀리더니 주변의 모습을 하나둘 돌려준다. 천변을 무성하게 덮고 있던 풀들이 마르고 개울물도 많이 수척해졌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뜰에는 하루가 다르게 계절이 깊어가고 있다. 풀잎 위에 내려앉은 단풍잎의 젖은 모습이 처연하게 다가온다. 가을은 조용히 다가와서 침묵하며 인내하는 시간을 준비시킨다.

나는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면 산책하러 나선다. 천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오래 묵혀진 갈등과 응어리를 풀어낸다. 마음 다스리기에 좋은 처방이 된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는 그만이다. 아트막한 산자락에 이어진 작은 밭들도 누워 쉬고 있는 고즈넉한 풍경도 만난다. 분주했던 여름을 보내고 옹기종기 어깨를 구순하게 맞대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베르네천의 봄 풍경(사진 최은경 조합원)
베르네천의 봄 풍경(사진 최은경 조합원)

내가 즐겨 찾는 산책길은 부천의 원미산과 춘덕산이 이어진 산자락의 조붓한 길이다. 집에서 가까운 베르네천의 천변 산책길은 행복감마저 안겨준다. 나들이를 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도 수도권 전철 7호선 까치울역에서 내린 뒤, 일부러 천변을 따라 집까지 걸어가는데 10여 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국적인 이름의 베르네천은, 원미산의 약수터에서 발원하여 도랑으로 흘러가다가 까치울역 근처에서 제법 넓은 하천으로 모습을 갖추고, 여월동과 오정동을 지나 굴포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다.

 

베르네천은, 임진왜란 때 이 하천 일대에서 벌어진 큰 전투로 인하여희생자들의 피가 하천을 물들여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물을 모두 버렸다고 하여 비리내, 배리내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떠도는 이야기일 뿐, 믿을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1911, 조선지지자료에는 경기도 부평군 하오정면 여월리 별인ᄂᆡ(別仁川)라고 기록되어 있다. ‘벼랑내라는 고유어를 한자로 옮긴 이두식 지명으로, ‘벼랑처럼 개울이 깊다라는 뜻의 이름이라고 한다. 벼랑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베리내, 베르내 등으로 변하면서 이국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알려진다.

베르네천은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생태하천으로 개발하였는데, 산책하기에 편하게 조성해 놓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도심으로 이어지는 소하천이지만 여러 생물과 다양한 식물들이 공존하며 생동하는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과 도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품고 있어 음유시인처럼 유유자적하며 거닐기에 좋다. 천변에 잘 조성된 나무들과 식물들이 철에 따라 다양한 꽃을 피우고 다른 옷차림으로 갈아입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나는 베르네천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변화를 눈여겨보며 계절을 느낀다. 일상의 변화를 눈에 담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다.

베르네천의 밤 풍경(사진 최은경 조합원)
베르네천의 밤 풍경(사진 최은경 조합원)

하천에 사는 물고기의 대부분은 잉어 가족이다. 녀석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사람이 물가로 다가서면 어느새 몰려와 먹이를 달라며 귀여운 입을 삐죽이 내밀며 뻐금거린다.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면서 하천에는 식구들이 많아졌다. 물고기의 숫자가 늘어나자 왜가리들이 자주 찾아온다. 긴 다리로 겅중거리며 걷다가 긴 부리로 쏜살같이 먹이를 사냥한다. 사색에 잠긴 듯 미동도 하지 않고 한쪽 발로 서서, 고뇌하듯 고개를 새을() 자로 숙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철학자다. 녀석의 움직임 없는 모습을 보고 방심한 물고기들이 지나가다가는 큰 낭패를 본다. 머리에 꽁지깃을 단 해오라기도 번뜩이는 눈으로 좌우를 살피며 물속의 먹잇감 찾기에 분주하다. 작은 새들도 날아들어 천변에서 살아갈 보금자리를 찾는다.

오리들이 베르네천의 주인이 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녀석들은 아예 터전을 잡고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수양버들의 이파리들이 돋아나고 가지가 길게 늘어지면 녀석들은 갑자기 소란스럽게 군다. 산란기를 맞아 암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묘기를 뽐낸다. 천변 위로 날아올라 선회비행을 하다가 내려앉는다. 며칠 동안을 날았다가 앉고 다시 날기를 반복한다. 암컷에게 멋진 비행 솜씨를 자랑하며 반원을 그리듯 크게 날다가,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앉는다.

4월의 베르네천
4월의 베르네천

녀석들의 비행은 꽤나 소란스럽다. 경박하고 요란스러운 행동만큼이나 잔잔한 수면에 일순간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잔잔하던 수면에 파문이 일면서 출렁거린다. 놀란 물고기들도 은신처를 찾기에 분주하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산란기가 되면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경쟁하듯 비행 솜씨를 자랑하다가 마음에 드는 암컷 곁에 보란 듯이 내려앉는다. 그런 모습에서는 학처럼 우아하게 나는 기품은 찾을 수 없다. 누가 뭐라고 하던 오리들은 절절히 구애하며 사랑을 나누고 새끼들을 길러낸다.

 

봄이면 버들강아지를 필두로 개나리와 매화가 피고 벚꽃과 조팝나무 꽃이 활짝 피어난다. 벌과 나비가 찾아들어 시선을 붙들면 곳곳에서 생명의 찬가가 울려 퍼진다. 줄기가 엉킨 칡넝쿨도 억세게 뿌리를 내리고, 키 큰 갈대가 사시사철 물속 깊게 발을 담그고 터를 잡았다. 볼 부은 개구리의 합창은 오월의 밤을 들뜨게 한다.

여름이면 뱀들도 똬리를 틀고 일광욕을 하다가 인기척에 놀라 풀 섶으로 스르르 제 몸을 감추고, 장지도마뱀이 지나가다가 눈인사를 건넨다. 덩굴장미가 피어나면 서양토끼풀과 개량 양귀비도 뒤처질라, 얼굴을 내밀고, 노란 붓꽃과 갈색 부들이 바람의 결을 따라 수줍게 반응하며 춤을 추듯 흔들린다. 수련이 물 위에 누워 일광욕을 하다가 물 주름을 따라 미끄러지고, 고마리도 한쪽에서 하얀 뿌리를 길게 내리고 식구가 되었다. 수양버들이 바람의 결을 따라 일렁이다가, 큰바람이 부는 날이면 나부끼듯 태질하며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4월의 베르네천
4월의 베르네천

 

가을이면 붓을 들어 산과 들을 채색하는 손놀림이 분주하다. 날마다 다른 모습을 그려내는 자연의 섭리가 놀라울 뿐이다. 눈에 익숙했던 주변의 경관도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모습을 선물한다. 하늘이 높아 보이는 계절. 맨드라미의 꽃도 색깔이 짙어지고, 강아지풀과 여뀌의 소박하고 순박한 정서가 어우러져 눈에 가득하다. 코스모스가 수줍은 얼굴을 내밀어 가녀린 자태로 하늘거린다. 유혹을 못 이긴 잠자리들이 꽃자리에 앉으려다 산들바람의 결을 따라 추는 아슬아슬한 춤사위가 멋스럽다. 박주가리도 바람결에 씨앗을 실어 멀리멀리 날려 보내기에 분주하다.

지난 밤 산책길에 쳐다본 밤하늘도 높아 보였다. 가을밤에는 밤하늘도 멀리 보인다. 아마도 태양의 온기가 점차 멀어져가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 같다. 이제 가을도 깊을 만큼 깊어져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한다. 조물주가 펼쳐놓은 목가적인 풍경은 오랜 향수를 불러내는 아련함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면 자연과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하며 느낀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고 작은 행복감마저 느낀다. 산책하다가 고향이 떠오르면, 추억의 언저리를 물맴이처럼 빙글빙글 맴돌다가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4월의 베르네천(사진 이종헌)
4월의 베르네천(사진 이종헌)

 

늦가을, 어머니는 별자리가 말곳하게 보이고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면 찬 서리가 내릴 징조라고 말씀하셨다. 가을걷이로 마음이 바빠지면 강아지와 부지깽이도 덩달아 설쳐댄다면서, 가을은 결코 서두르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호들갑을 떨면 정신만 사나워진다며, 일을 바투 잡고 하나하나 차분히 거둬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둬들이고 추수해야 할 농작물이 많았다. 고구마를 캐서 바자울로 옮기고, 풋고추와 애호박도 따야 했다. 무와 배추를 뽑아 땅속 깊이 묻고 무청은 시래기가 되도록 처마 밑에 매달았다. 들깨는 털어내지 않으면 스스로가 알몸이 되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를 놓칠라, 산비둘기와 까치는 물론, 참새와 멧새까지 찾아와 잔치를 벌인다. 날짐승과 먹을거리를 두고 다투는 분주한 손길은 가녀리기조차 하다. 가을이면 어머니의 치마폭에서는 들깨 냄새가 폴폴 났다.

산책길, 스산한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계절 따라 스러지고 멀어져가는 것들을 눈에 담아둔다. 머지않아 감국과 구절초마저 꽃잎을 떨구기 시작하면 찬바람이 쏜살처럼 몰려올 것이다. 한 해 동안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내는 은행나무와 낙엽송처럼 잡념을 벗어낸 빈 몸이 되고 싶다. 세상살이에서 입은 거추장스러운 허욕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싶다.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솔가리를 털어내고 푸른색을 지키며 살고 싶다. 지친 영혼을 맑은 바람에 씻어내는 소나무처럼 청빈함을 배우고 싶다.

가을은 소소한 행복을 찾아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산책은 자연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좋다. 고민도 털어내고, 불편했던 마음도 위로하며, 힘들게 하던 사람들도 용서한다. 때로는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하지만, 분주함에서 벗어나 모처럼 허허로워진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비워내는 시간이다. 나에게 산책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선물이다. 포르릉포르릉 날며 강아지풀의 씨앗을 쪼던 참새가 털갈이하기에 분주하다. 햇살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아는지 연보라색 쑥부쟁이도 수줍게 일광욕을 하고 있다. 산책은 많은 생각에 잠기게도 하지만, 선물처럼 글감을 주기도 한다. 이제는 겨울을 맞으러 길을 나서야 할 시간이다. 베르네천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김태헌 수필가

2006국제문예등단

매월당 문학상 및 법무부 공모전 등 다수 수상

모범공무원 표창(국무총리), 근정훈장 수훈

국제문화예술협회 사무국장, 시향서울낭송회 부회장 역임

무늬가 되는 일상, 수필동인

()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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