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살아오는 동안 회초리로 혼쭐나게 맞아야 할 정도로 잘못했던 일들이 꽤 있었다. 바지를 걷어 올려 알종아리를 내놓고 따끔하게 매를 맞았던 기억은 나를 바로 세우곤 한다. 어머니는 짐승 못된 것은 잡아먹기라도 하지만, 사람 못된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고 가르치셨다. 지금까지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왔다. 매 맞는 일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구설이 오르내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난이라는 매를 맞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회초리와 비난은 눈을 부릅뜨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에 태어났다. 당시, 학생의 수에 비해 교실이 턱없이 부족하여 2부제 수업을 하였다. 1주일 단위로 오전반과 오후반이 바뀌었다. 등굣길은 학교 뒷동산 옆을 흐르는 냇가를 건너가야 했는데,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어린 호기심을 자극했다. 학교를 오가며 가방을 벗어 던진 채, 놀이에 정신이 팔리기 일쑤였다. 넓게 펼쳐진 들판은 놀이터였고, 놀잇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고삐 풀린 나는 휘뚜루마뚜루 뛰어다니는 망아지가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하루는 큰집 형님께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학교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냇가에서 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혼을 냈다. 오후반 수업을 고스란히 빼먹은 것이다. 급기야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나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종아리를 내놓은 채 다듬잇돌 위에 올라가야 했다. 회초리로 매를 맞는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지레 겁을 먹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훌쩍이면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다행히 회초리로 맞진 않았지만 따끔하게 혼이 났었다. 나를 꼭 안아주시던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에 안겨 더욱더 서럽게 울었다. 이튿날, 담임선생님께서 불러나갔는데 엉덩이에 불이 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라는 것을 맞은 것이다.

서당, 《단원 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서당, 《단원 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돌멩이를 잘못 던져 교실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겁을 잔뜩 먹고 도망가다가 선생님께 혼이 났다. 유리창 값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혼이 날 것 같아 잘못을 숨기기 위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거짓말을 했다. 유리창 값을 갖다 드리고 오던 날,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얄팍한 거짓말을 이미 알고 계셨다. 실수로 유리창은 깨뜨릴 수 있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과 함께 따끔한 사랑의 회초리를 맞았다. 나는 거짓말을 하면 더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가늘고 낭창낭창한 대나무가지로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은, 두고두고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모든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하고, 어긋난 행동을 하면 끔찍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을 일찍 배운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중학교 진학을 위한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시기였다. 담임은 무섭기로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이셨다. 시험을 보고 나서 평균 점수나 등수가 떨어지면, 그만큼의 매를 맞아야 했다. 선생님은사랑의 매라고 지칭하며, 손바닥과 종아리가 따끔하도록 혼을 내시곤 하셨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종아리를 맞았는데, 책상 앞에 서면 지레 겁을 먹고 우는 친구도 있었다. 종아리에는 푸르뎅뎅하게 멍이 들고 회초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우리는 책가방에 진통소염제인 안티푸라민 연고를 필수품처럼 넣고 다니면서 매 맞은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서로의 종아리에 발라주곤 하였다. 신통하게도 붓기가 빨리 없어지고 맞은 자국과 멍도 쉽게 가셨다. 아픈 기억보다도 사랑의 매를 맞았다는 세뇌된 감사함을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그런 날은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회초리는 싸리나무로 만들었는데, 싸리나무 회초리로 맞으면 상처가 나거나 멍이 들지 않아 사랑의 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향에는 대나무 숲이 많았다. 구태여 산에 가지 않더라도 싸리나무 대신 구하기 쉬운 대나무를 회초리로 사용하였다. 특히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대나무 뿌리로 만든 매를 사용한 것이다. 대나무 뿌리는 예리한 칼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톱으로 잘라내야 할 정도로 억셌다. 곧게 뻗은 마디와 마디 사이는 20센티미터 정도로 길지만, 뿌리의 마디 사이는 2~3센티미터로 촘촘하고 짧았으며 육질이 매우 단단했다. 뿌리로 만든 매는 아프고 매웠으며 아릴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하였다. 매로 훈육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절.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항의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허튼짓이나 말썽부리는 것을 경계하며 살아왔다. 비난받지 않으려고 눈치를 일찍 배웠다. 매에는 장사가 없으니 매 맞을 일은 절대 하지 말라던 선생님의 따끔한 가르침도 컸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제자를 격려해 주시면서 대견해하시던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인자하던 미소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날은 세뇌된 감사함을 지우고,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지혜를 주셨다. 남다른 제자 사랑으로 큰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은 오래전 세상을 떠나셨지만, 여전히 존경과 감사함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다.

아버지께서는 집 기둥에 회초리 하나를 상징적으로 걸어놓으셨다. 잘못된 행동으로 비난받거나 지청구를 듣게 되는 경우, 회초리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시각적 효과만으로도 따끔하게 깨닫도록 한 것이다. 어머니께서 사람의 겉모습만 만들었지, 속까지 만들지는 못했다라면서 너 스스로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 삶이 달라질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나태하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바로 세우는 매서운 회초리가 되었다. 두 눈에 불꽃이 번쩍 튀게 하는 따끔한 회초리. 맵고 아픈 가르침의 약이 된 것이다.

나는 결코 회초리 예찬론자가 아니다. 체벌을 옹호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매로 사람을 다스리는 폭력은 사라져야 한다. 머지않아 마음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세상이 다가올 것이다. 세상살이에 흔들릴 때마다 이기적인 나를 다스리고 정신 바짝 차리게 하던 매운 회초리가 생각난다. 회초리는 나를 바로 세우는 스승이었다. 비난받지 않는 삶을 살도록 일깨우던 회초리. 가끔 그 회초리가 파열음을 내며 앙칼지게 나를 내리친다. 이따금 회초리의 따끔한 맛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 김태헌 수필가

2006국제문예등단

매월당 문학상 및 법무부 공모전 등 다수 수상

모범공무원 표창(국무총리), 근정훈장 수훈

법무연수원 교수 엮임

법무부장관 표창 3

청소년선도대상 공직부문 본상 수상

국제문화예술협회 사무국장, 시향서울낭송회 부회장 역임

무늬가 되는 일상, 수필동인

()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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