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곡 용서점 글쓰기 모임 『써용』  활동 장면. (이 사진은 코로나19 펜데믹 이전에 촬영된 것입니다) 
역곡 용서점 글쓰기 모임 『써용』  활동 장면. (이 사진은 코로나19 펜데믹 이전에 촬영된 것입니다) 

최근, 실연했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급작스레 삶에 닥쳐온 시련 앞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보편감정에 대한 경험이 생긴 것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 이제 이별 이야기도 써볼 수 있겠구나. 더 깊은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절절한 연애 이야기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당장 일상의 순간들 속에 스쳐 가며 내 맘을 후벼파는 감정들을 경험해도, 그건 언젠가 다 나의 글짓기에 양분이 될 거라는 생각에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글짓기에 미친 사람이 된 걸까? 글짓기에 미쳤다기보단, 글로서 내 삶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해진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돌아보면 꽤 오래전의 시간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이였는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그림 그리기가 아닌 글짓기 방과 후 수업에 나를 등록시켰다. 어찌나 그것이 불만스러웠는지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건 엄마의 놀라운 혜안으로 내렸던 판단이었다. 글짓기 수업에서 무얼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고 있다. 수업 마지막에는 각자가 지은 시 한 편을 가지고 학교 복도에서 시화전을 했다. 8절 도화지에 정성스레 시 전문을 적고, 그 옆에는 그림을 직접 그렸다. 나는 그림 그리기 수업을 못 들었던 한을 시화 그리기로 그나마 풀어냈다. 그때 내가 지었던 시의 제목은 <나비>였다.

유난히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노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혼자 책보기를 즐거워했던 어린이였으니 자연스레 글 짓는 일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별것은 아니어도 가끔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듣는 칭찬이나 작은 백일장에서 받았던 장려상 따위를 보며, 나에게도 재능이 있는 걸까 생각해본 적도 많았다. 그러나 대학 수험생활을 하며 문학소녀는 입시생의 삶만을 살기에도 벅찬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수도권에 적당한 국문학과를 입학했으나, 글 짓는 일이 과연 나를 먹여 살리는 직업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학과 친구 중에는 정말로 특출난 재능이 있어서, 아직 학생임에도 등단하여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다른 과와 크게 다르지 않게 취업을 준비하느라 이런저런 자격증 공부를 했고, 더러는 교직 이수를 하며 나름대로 살길을 궁리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든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단지 글 짓는 것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글만 짓는 사람으로 살기엔 녹록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나는 전공과는 크게 관련 없는 회사에 취직했다. 일반적인 종류의 회사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회생활은 사회생활이었다. 학창 시절엔 경험할 수 없었던 다양한 삶의 부침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들이 생길 때, 내가 반드시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글을 써 내려가는 일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펜을 들고 종이에, 혹은 노트북을 켜서 자판을 두드려가며 내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에 대해 적었다. 일단 뭐라도 적어야 마음이 후련했다. 머리와 가슴 속에 담겨있던 실체가 불확실해 보이는 어떤 것들을 꺼내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털어내었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일단은 몇 줄의 문장과 문단으로 쏟아져 나온 글이 있다면 괜찮아졌다. 글을 쓰기 전보다 이후에 좀 더 이 세상을 마저 살아갈 만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홀로 글을 쓴 지 몇 년이 지나고, 거주지를 옮길 즈음에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는 온 인류의 역사에 길이 기록될만한 일이니, 당연하게도 내가 하고 있던 일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오프라인으로 움직임에 제한을 받다 보니 묘하게도 여유시간이 생겼고, 나는 새로 이사 왔던 동네를 탐방하다가 작은 서점 하나를 알게 되었다. 미리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미처 눈치채지도 못했을 동네 깊숙한 곳 골목에서 작고 따뜻한 공간을 발견했다. 책이 가득 있고, 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꼭 책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점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중엔 함께 모여 글을 짓고 나누는 모임이 있었다.

혼자서 글을 짓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때 훨씬 시너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료들을 그냥 찾기란 쉽지 않았고, 나와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을 회사에서 찾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서점에서 운영하는 모임에 관심이 있었고, 또 참여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은 내 글을 짓고, 나머지 한 시간은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을 돌아가며 듣는다. 아주 단순한 패턴을 지닌 모임이지만, 다양한 연령과 성별, 직업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제각각의 글을 짓다 보면 혼자서 글을 지을 때와는 달리 더 풍성하고 깊은 글맛을 느끼게 된다. 나누는 글 너머에 있는 사람이 보이고, 반대로 내가 지은 글 속에 담겨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글을 짓고, 나누는 일. 마치 밥을 짓듯이 꾸준하게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이다. 늘 잘은 안 되더라도 못 먹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기를 바라며 지어본다. 조금 설익은 밥이 되기도 하고 진밥이 되기도 하겠지만, 어느 날은 모든 것이 딱 알맞게 들어맞아 맛있고 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일단은 일요일 열시, 정해둔 시간에 모임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 글을 짓는다. 글을 짓고 나눈다. 오늘 쓴 글맛은 좀 어떠려나. 대단치는 않아도 일단 글을 지었다는 사실에 만족해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지어야지. 언젠가는 모든 것이 딱 알맞아 맛있고 따끈한 글을 지어내는 순간이 지금보다 좀 더 많아지기를 소망하며 말이다.

글 홍참빛(역곡 용서점 글쓰기 모임 써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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