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일 토요일, 640분 신도림역에서 일행을 만나 출발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쏟아진다는 언론보도가 있는데도 도로는 차들로 넘쳐났다. 미안한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우리도 그 긴 차량의 행렬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앞자리의 선배들은 운전하랴 말벗해주랴 힘들었겠지만, 뒷자리의 나는 맘 편하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느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초가을의 정취를 느낄 새도 없었다.

그렇게 먼 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단풍은 아직 멀었지만 누렇게 익은 벼들과 아직도 푸르른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저절로 마음이 넉넉해졌다.

무주 하면 구천동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무주가 구천동인지 구천동이 무주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무주구천동은 하나의 고유명사로 무주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무주에는 구천동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무주 홍보의 성공사례라고 해야 할지 실패사례라고 해야 할지?

그동안 무주에 몇 번 다녀가기는 했으나 막상 무주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무주리조트와 곤돌라를 타고 향적봉에 올랐던 기억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래도 향적봉과 이어진 산등성이들이 꼬이고 얽힌 채로 이 세상 끝까지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너무 강렬하고 선명하여 언제고 기회가 되면 그 능선을 따라 걸어보고 싶긴 했었다.

숨 막히게 더웠던 8, P 선배가 갑자기 무주 구천동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너무 더운 때라 1박을 하자는 제안에 좀 시원해지면 가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구천동 길, 톨게이트를 지나 제1경 나제통문까지 가는데도 계속되는 골짜기가 어찌나 길고 깊은지 끝이 없어 보였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하고 배가 고팠는지 선배들은 나제통문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으로 직행하잔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럴 수가 없었다. P 선배가 각자의 방식으로 감상하고 이해하고 즐기자고 했다. 선배의 그런 태도가 참 좋다.

강무경 의병장 동상과 김환태 문학비
강무경 의병장 동상과 김환태 문학비

 

주차장에 내리자 어지럽게 허공을 가르고 엮고 지나가는 전깃줄 아래로 강무경 의병장의 동상이 보인다. 저 얽히고설킨 전깃줄처럼 세상이 어지러웠던 시절, 세상의 작은 불씨 하나 피우기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강무경 의병장, 잠시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리고 저절로 떠오르는 한마디,

감사합니다.”
 

K 선배는 조각상의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나는 지난 역사의 한 부분이나마 기억하게 해주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옆에 읽기도 쉽지 않은 표지석이 하나 더 서 있다. 강무경 의병장과 그의 부인 양방매 의병에 관한 기록이다. 숙연해지다 못해 뭔가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강무경 의병장 동상 가까이에 눈에 띄는 조형물이 하나 더 있다. 눌인(訥人) 김환태 문학기념비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분인데 기념비 건립에 관여하신 분들의 이름이 심상치 않다. 학창 시절에 들었던 웬만한 유명 문인들의 이름은 다 있는 것 같다. K형은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의 이름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가자, 무주 구천동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무주 구천동 구경을 할 차례다(비록 구천동을 다 보지는 못하겠지만.). 보통 다른 지역에서는 경치가 빼어난 곳을 8경으로 부른다.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시작된 말이다. 특별히 경치가 빼어난 계곡이 있고 그곳과 관련된 뛰어난 인물이 있는 경우에는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곳에 따로 이름을 붙여 9곡이라고 했다.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이 무주 땅은 도대체 얼마나 골이 깊기에 구천동(九千洞)이고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기에 33경인 것일까?

나제통문
나제통문

 

1경 나제통문(羅濟通門)

백제와 신라의 관문이라는 뜻의 나제통문은 정말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문일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서로 간에 전쟁으로 영토를 뺏고 빼앗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던 그 시절에도 백제사람이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이곳이 아니라 어디에든 신라와 백제가 서로 오갔던 관문이 있다는 얘기는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 터널이 생겨 원래 백제 지역이었던 설천면과 또 신라 지역이었던 무풍면이 도로로 연결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금광개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임산물과 농작물을 신속히 옮기기 위해 뚫은 신작로라는 말도 있는데 무주군청에 문의해 본 결과 언제 어떤 연유로 이 터널이 생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기니미굴로 불리던 이곳이 나제통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50년경 안성면장이었던 김철수 옹이 무주군의 향토지인 적성지(赤城誌)나제통문으로 불러야 한다는 글을 게재한 이후부터이고 글씨는 이 고장의 명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선생이 1976년에 썼다고 한다.

은구암
은구암
은구암
은구암
은구암 바위글씨
은구암 바위글씨

 

2경 은구암(隱龜巖)

나제통문을 살펴보고 2경 은구암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자연 바위에 새겨진 면장의 선정비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은구암이란 이정표는 구산마을 표지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K 선배가 용케도 이정표를 발견했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마을 초입에 차를 세우고 마을 길을 걷는데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옥수수를 수확하고 나서 옥수숫대의 윗부분만을 잘라낸 채 동부를 심었는데 동부의 덩굴이 옥수숫대를 감고 올라간다. 이런 걸 삶의 지혜라고 하는 걸까? 애써 지주를 세우지 않아도 되고 따로 세운 지주보다 땅속에 뿌리 박고 있으니 웬만한 비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연신 감탄을 거듭하며 아름다운 마을 길을 걸었다. 앞장서 걷고 있는 두 선배의 모습은 자연 속에 동화된 한 편의 그림이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계곡 건너 수직으로 선 높은 바위에 운장대(雲壯臺)라는 글씨가 보이고 눈앞에는 커다란 소나무를 머리에 인 바위 언덕이 보이는데 문득 인기척에 놀란 거북이 한 마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구천동 제2, 은구암(隱龜巖)이다. 은구(隱龜)숨어있는 거북이라는 뜻으로 물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는 거북의 형상 그대로다. 거북의 앞쪽으로는 시멘트로 보를 막아놓았다. 선녀들의 놀이터를 사람이 만들어 놓았을까? 바위에는 강선대(降仙臺)라고 새겨져 있다. 옛날 선비들이 자주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는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강선대(降仙臺), 상덕계(尙德稧)라는 글씨와 함께 무계구곡(武溪九曲)이란 글씨도 보인다. 이 지역에서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인근 지역의 인사들과 교류하던 구한말의 학자 송병선(宋秉璿)이 이름 붙인 <무계구곡>의 시작점을 알리는 글씨이다.

이곳 은구암은 평평하고 너른 바위가 있어 여럿이 앉아 쉬거나 놀기에도 그만이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는 데크와 텐트 등을 빌려주기도 한단다.

청금대
청금대

 

3경 청금대(聽琴臺)

청금대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려가야 하는데 길이 쉽지만은 않다. 꽃피는 춘삼월, 친한 벗들과 함께 너럭바위에 앉아 유유자적 거문고 소리를 듣는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게 무엇 있을까? 문득 밝은 달, 흐르는 구름, 솔바람 소리, 물소리 벗 삼아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음풍농월하던 옛사람들의 풍류가 그리워진다.

4경 와룡담, 5경 학소대, 6경 일사대는 가까이에 모여있고 입구도 같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벽정(棲碧亭)이 있다. 단풍나무 뒤로 마주 보는 바위가 서벽정의 출입구가 아니었는지? 나무에 매어 놓은 개가 집 지킬 생각은 조금도 없이 낯선 이에게 꼬리를 살랑거린다. 서벽정은 송병선이 학문을 연구하고 사람들과 교유하고 후학을 가르친 장소라고 한다. 문이 잠겨 있어 담장밖에서 목을 쑥 빼고 들여다보고만 왔다.

와룡담
와룡담

 

4경 와룡담(臥龍潭)

와룡담 가는 길은 일단 험하다. 표지판은 있는데 길은 없다. 멧돼지 퇴치용 전기선이 쳐진 복숭아과수원을 지나서 무성한 풀숲을 헤치고 가야 한다. 금방 뱀에 물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길 없는 길을 내려와 물가에 서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의 출입이 없어 손을 타지 않은 원시림 같은 느낌이랄까? 물은 너무 잔잔하고 고요하다. 바위들도 뾰족하지 않아서 좋다.

평평한 바위에 그냥 등을 대고 드러눕자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 부시지 않아 좋다. 바위의 시원함과 조금은 결이 다른 물의 시원함이 지친 육신을 쓰다듬어 치료해 주는 느낌이다. 눕거나 앉아서 책을 보기에도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책을 그대로 펼친 채 눈 위에 올려놓으면 눈이 감길 사이도 없이 스르르 잠이 들 것 같았다. 물가 나무 사이에서 푸른 꿈을 꾸고 나면 시 한 수, 글 한 편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이곳 와룡담이 제일 마음에 든다.

서벽정
서벽정

 

5경 학소대(鶴巢臺)

와룡담에서 0.6km 지점, 서벽정 동쪽 계곡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던 노송이 있던 명소다. 근처에 서벽정이 있다.

일사대
일사대

 

6경 일사대(一士臺)

일사대는 원래 이름이 수성대(水城臺)였으나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연제(淵齋) 송병선(宋秉璿)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훌륭한 선비라는 뜻으로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 칭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개울을 가로지른 다리는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 금지다. 계곡 옆에는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고 물은 쉼 없이 흐른다. 바위 어딘가에 바둑판도 있고 연제 선생의 9대조인 우암 송시열의 글귀도 있다는데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가만히 앉아 경치만 감상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구천동의 경치에 마음을 빼앗겨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가 어서 돌아가라고, 갔다가 다시 오라고 내 어깨를 떠민다. 나머지 경치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서둘러 숙소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 이가경(와운루계회 회원, 콩나물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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