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 심리’ 5

김환기, '우주 Universe 5-IV-71 #200', 코튼에 유채, 254x254cm, 1971년, 개인소장

천재 시인 이상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화가가 있었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코로나 블루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많은 사람에게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게 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높은 경지를 세계에 알린 화가 김환기(1913~1974)의 작품 산울림 19--73 #307에 가득한 세룰리안 블루는 사랑을 부르는 컬러다. 세룰리안 블루(cerulean blue)는 코발트 주석으로 만든 청색 염료로 2000년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색이었다.

한국 미술계에 피카소와 버금가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등장했다. 2019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작품 우주 Universe 5--71-#200이 약 132억 원에 거래되었다. 202012월 서울옥션 자료에 의하면, ‘한국 작가 미술품 경매가() 순위 109개가 김환기의 작품이라고 소개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필자는 지난 9월 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에서 김환기의 작품 두 점을 만났다. 첫 번째 작품은 푸른 은하수에 무수한 별이 다이아몬드처럼 촘촘히 박힌 듯한 산울림 19--73 #307이다. 제목은 1973219일에 제작한 일련번호 307번째 그림이라는 뜻이다. 점 하나를 그리고 네모로 둘러싸는 기법으로 264×213cm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영롱한 푸른 색채가 수채화처럼 물들어있었다. 밤하늘에 번져있는 무수한 점에 스민 세룰리안 블루의 은은한 그러데이션에서 환영이 보였다. 고향의 푸른 산이 숨어있고 사무치게 그리운 친구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성스럽게 찍어 그린 고통의 흔적이 담긴 작품을 보니 가슴에 저릿저릿한 전율이 일었다.

 

김환기, '산울림 19-Ⅱ-73 #307', 코튼에 유채, 264×213cm,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 '산울림 19-Ⅱ-73 #307', 코튼에 유채, 264×213cm,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는 전남 신안의 천석꾼 집에서 태어났다. 193725세에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하여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추상화를 접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서게 한 여인이 있었다. 그가 첫눈에 반한 여인은 김향안(본명 변동림)이다.

그녀는 시 오감도(烏瞰圖)로 유명한 천재 시인 이상과 결혼할 당시 22세의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이었다. 결혼 3개월 만에 이상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시집을 출간하였다. 정략결혼에 갈등을 느껴 이혼한 김환기는 지인의 소개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1년 동안 절절한 사랑이 담긴 연애편지를 보내던 그를 마침내 받아들였고, 딸이 셋 달린 이혼남과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한 가족과 연을 끊으며 이름까지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그들은 수많은 예술가의 축복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당시 그녀는 아담한 체구를 지닌 29세의 신여성이었고, 그는 키가 190cm인 마른 체형의 32세 멋쟁이였다. 그들의 파격적인 러브스토리는 장안의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광복 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지내던 김환기는 조선백자에 심취하여 달항아리를 그렸다. 이번 컬렉션에서 두 번째로 만난 작품 여인들과 항아리는 달항아리 시리즈의 백미로 꼽힌다. 1950년대에 그린 281×567cm 크기의 대작으로 옥색의 부드러운 색감과 어우러진 여인과 항아리와 사슴이 수레에 담긴 꽃처럼 희망을 소곤거리는 듯했다.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코튼에 유채, 281×567cm, 195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코튼에 유채, 281×567cm, 195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세계 무대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해하며 파리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향안은 다음날 프랑스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하고 불어 공부를 시작했다. 1955년 그녀는 혼자 파리로 가서 갤러리의 문을 두들기며 전시회의 기회를 찾았으나 콧대 높은 파리 미술계의 장벽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1년 후 집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파리로 간 환기는 좋아하던 술까지 끊고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죽기 살기로 그림에 매달리며 조선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향안의 눈물겨운 헌신으로 유럽 6개국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나 컬렉터들은 아시아에서 온 낯선 화가의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빈털터리가 되어 3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1963년 홍익대 미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미술제)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뒤,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으로 직행했다. 1964년 새롭게 도전했던 뉴욕에서의 첫 전시는 혹평을 받았고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데 꼬박 4주가 걸려, 1년에 겨우 10점 정도만 제작하는데, 그나마 1966년에 분신 같은 작품 30점을 도난당하는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그는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지독한 가난으로 물감과 캔버스를 구할 돈이 없어서 신문지와 전화번호부에 그리기 연습을 하였고, 향안은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하면서 남편 환기의 꿈을 지켜주었다. 1970년에서 1974년 사이, 거대한 캔버스에 무수한 점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전면점화(全面點畵)로 추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고통과 절절한 그리움의 눈물방울이었을 것이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파리에 있을 때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절통함과 고국에 두고 온 세 딸을 생각하며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담아냈다. 친구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1971, 뉴욕의 표인덱스터 화랑에서 전시한 개인전이 호평을 받아 뉴욕타임스에서 격찬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코튼에 유채, 236x172cm, 1970년, 환기재단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코튼에 유채, 236x172cm, 1970년, 환기재단

부부가 나란히 찍은 흑백 사진 속에서 영혼을 불사른 내조의 어울림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치른 희생이 눈물겨웠다. 지독한 가난으로 샌드위치 한 개를 반쪽씩 나눠 먹고 몇 개월씩 방세도 밀리며 아파도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조차 못 냈지만, 밤새워 예술혼을 불태웠다. 작품 속 점 하나하나가 삐쩍 마른 예술가의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61세에 건강이 심하게 악화하였고, 목과 척추 부위의 디스크를 수술하였으나 병원 침대에서 낙상하여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사랑했던 그를 떠나보낸 상실감에 주저앉지만 않았다. 여러 권의 책을 내고, 회고 작품전을 열며, 작품 도록(圖錄)을 만들어 그의 예술혼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있는 온갖 힘을 다하였다. 1976<김환기 재단>을 세웠고, 1992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하였다.

 

김환기와 김향안,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1957년,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김환기와 김향안,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1957년,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색채 테라피에서 퍼스널 컬러 테스트로 자신에게 맞는 컬러를 알 수 있다. 그녀의 퍼스널 컬러는 세룰리안 블루가 아니었을까. 이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하고 자립심이 강하며 용의주도한 전략가 타입이다.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도움을 주는 스타일이다.

18세기에 파란색은 낭만적인 사랑을 상징했다. 중세 기사 문학에서 적기사(赤騎士)는 악한 자이고, 흑기사(黑騎士)는 베일에 싸인 자이며, 청기사(靑騎士)는 충실한 애정을 가진 자로 여겼다. 1774년 괴테의 저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유럽을 사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살로테를 처음 만날 때 입었던 주인공 베르테르의 파란색 연미복은 패션 트랜드가 되었다. 파란색은 낭만적인 사랑의 색깔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입은 세룰리안 블루 스웨터.
2006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입은 세룰리안 블루 스웨터.

컬러에는 그 시대의 문화가 녹아있다. 2006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잡지 보그 VOGUE’의 편집장 미란다는 비서인 앤 해서웨이가 입은 파란 스웨터를 가리키며 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네가 입은 건 그냥 블루가 아니야 정확히 '세룰리안 블루'. 2002년엔, 이브 생로랑이 컬렉션을 했지. 명품으로 사랑받았고 수백만 달러의 수많은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했어.”

색채는 브랜드의 가치를 대변한다. 금융감독원의 2020년 상반기 자료에 의하면, CJ대한통운이 국내 택배 시장의 42.56%를 점유했다고 한다. 이 기업을 상징하는 세룰리안 블루는 고객들에게 물류 문제를 스마트하고 신뢰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와 호소를 담고 있다. 스포츠 이온 음료의 대명사인 포카리스웨트의 파란색은 청량감을 강하게 부각하며 시원한 느낌을 준다.

세룰리안 블루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로맨스를 꿈꾸게 한다. 코로나 블루로 지친 마음속에 따뜻한 세룰리안 블루를 품어보자. 이 가을, 독자의 마음에 진솔하고 로맨틱한 러브스토리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길 기대해 본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