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 교수의 '리드 러시아 Read Russia'

유형에 여성과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유형수 무리가 러시아의 중심부에서 시베리아 미지의 변방으로 이동한 것은 1620~30년대였다. 1670~80년대에는 바이칼 인근까지, 이후 바이칼 너머로까지 유형수의 발길이 이어졌다. 카잔 현() 출신의 유형수 가족들로 알려진 여덟 가족(남자 29, 여자 19)176971일 니즈네우딘스크에 도착한 이래로 여성과 어린이들도 유형을 떠났다. 자립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은 부모를 쫓아서였고, 여성들은 자신들의 죄로 또는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유형 길에 올랐다.

19세기 내내 유형수 중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크로푯킨이 러시아의 감옥과 유형, 그리고 강제노동에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1892년 예니세이 현의 경우 여성은 4,700명으로 전체 유형수 인구의 9%를 차지했다. 이들 가운데 남편을 따라 유형 온 비율이 22.5%이다. 이르쿠츠크 현의 상황도 대동소이하다. 여성은 유형수의 7.3%, 그중에서 30%가 남편과 동행했다. 계속해서 크로푯킨은, 19세기에 걸쳐 러시아는 매년 4천 또는 5천 명의 남성, 여성들을 평생 기한으로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다른 국가들에서라면 그 사람들은 몇 루블의 벌금만 선고되었을 것이다. 이런 범죄자들에 추가로, 매년 자신들의 남편이나 아버지를 뒤따라와서 시베리아 여행이라는 끔찍한 공포와 유형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1,500명의 여자와 2,000~2,500명의 아이를 덧붙여 헤아려야만 한다.”라고 썼다.

남편 유형수를 따라나선 아내나 아이들에게는 생활비 명목으로 하루에 10코페이카가 지급되었고 약간의 관급품도 지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척박한 유형지에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여자 유형수들과 유형을 따라나선 여성들은 유형지로 가는 도중이나 앞으로 머물게 될 유형지에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을까. 그들의 생계 수단은 대부분 매춘이었다. 막심 고리키의 세상 속으로(1913)는 이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녀의 남편은 지폐위조 죄로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는데, 호송되기 전에 이 마을 감옥에 수감 되어 있었어. 그런 여자를 알게 되었지. 그녀는 돈이 한 푼도 없었어. 포주가 나를 소개해주었던 거야. 그녀는 젊고 아주 예쁜, 정말 멋진 여자였어. 한두 번 만나고 나서 내가 말했지. ‘어떻게 할 참이오? 남편은 사기꾼이고 당신은 이렇게 부정하게 살아가니, 왜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려는 거요?’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유형지까지 따라갈 생각이었어. 글쎄, 이렇게 말하더라니까, ‘그분이 어찌 되었든 나는 그분을 사랑해요, 그분은 나에겐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 나 때문에 죄를 지었을 거라고요, 난 당신과 죄를 지었고요, 난 그를 위해 돈이 필요했어요.

 

고리키가 13~14살 무렵 도제 겸 더부살이를 했었던 주인-외숙부에게서 직접 들은 것임을 고려하면, 1884~1885년 실제 유형의 모습을 이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여성을 매춘으로 잡아끌었다면, 인위적으로 뒤틀린 성비(性比)는 본성적 측면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부추겼다. 여성은 전체 유형수 인구 가운데 10% 내외에 불과했다. 유형의 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여성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매매의 제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체호프가 사할린섬에서 보여주었듯 성병과 매독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시베리아에서 중노동과 매춘을 하며 남성들과 동등한 또는 훨씬 더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생계 문제뿐만 아니라,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의 권리와 처우 역시 처참한 수준이었다. 유형의 길을 가는 도중에 또는 유형지에서 여성 유형수는 정치범이든 형사범이든 호송병이나 간수의 강간과 폭언, 폭력에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크로푯킨의 책에서 한 여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나는 남성과 여성이 뒤섞인 50명의 수인과 함께 빌나(빌뉴스의 옛 이름-필자)로 보내졌다. 기차역에서 우리를 도시 감옥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늦은 밤까지 문을 열어놓은 채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2시간 넘게 세워놓았다. 마침내 우리를 어두운 복도로 밀어 넣더니 수를 세었다. 두 명의 군인이 나를 붙잡더니 비열하고 모욕적인 짓을 했다. 그런 강간은 나 혼자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수많은 다른 여성들이 질러대는 절망적인 비명들을 들었다. 수도 없는 욕설과 더러운 호통 소리를 들은 후에 불이 켜졌고 나는 드넓은 방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용문의 여인, 사건을 술회하는 1인칭 서술자는 외국인과 결혼한 귀족이었고 페테르부르크에 유력인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의 도움으로 유형을 면하고 외국으로 추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여성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상상 그 이상의 끔찍한 대우와 폭력에 고통받아야 했다. 아래의 그림은 카라의 비극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N. A. 카사트킨, ‘시기다(카라의 비극)’, 1930.
N. A. 카사트킨, ‘시기다(카라의 비극)’, 1930.

 

두 호송병이 한 여인을 데리고 간다. 잔혹한 얼굴의 두 호송병은 총으로 그녀를 서둘러 가라고 밀치는 것 같다. 그녀는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상체는 앞으로 내밀었지만 다리는 뒤처져 있다. 그녀의 뒤에는 회초리가 널브러진 의자, 회초리가 담긴 물통, 매질을 끝내고 담배 한 대 태우려는 듯 담뱃갑을 든 장교 등이 보인다. 회초리로 매질을 당한 여인을 다시 숙소로 데려가는 모습이다. 체벌을 당한 후에 끌려가는 여인의 파리한 얼굴이 너무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게 보인다.

'시기다(카라의 비극)' 부분화.
'시기다(카라의 비극)' 부분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러시아의 여자 혁명가 나제즈다 콘스탄티노브나 시기다(1862~1889)이다. 시기다는 1862년 타간로그에서 태어나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안톤 체호프의 여동생 마리야도 시기다와 같은 김나지움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1883년 시기다는 인민의 의지당에 가입하였고 1885년 지하출판물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1886년 체포되어 혁명가들을 도왔다는 죄로 강제노동 8년 형이 선고되어 카라 강제노동수용소로 이감되었다.

1889831일 시기다는 수용소장 마슈코프의 뺨을 때린 사건에 연루된다. 1888년 봄 현지사-장군 코르프 남작이 카라수용소를 방문하였을 때 정치범 엘리자베타 코발스카야는 정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남작 앞에서 일어서기를 거부했다. 수용소장 마슈코프는 코발스카야를 치타 감옥으로 이감시키라 명령했다. 시기다와 그녀의 동료들은 마슈코프의 결정에 항의하는 청원서를 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최후의 방법으로 시가다는 대중 앞에서 여성에게 뺨을 맞은 장교는 불명예 퇴임한다.’라는 당시의 관례를 이용하여 마슈코프를 자리에서 쫓아내려 했다.

그런데 마슈코프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대가로 시기다에게는 18891010일 회초리 100대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체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기다와 동료 3명은 치사량의 아편을 먹고 음독을 시도하였다. 결국 시기다는 118일 밤에 먼저 숨을 거두었다. 나머지 3명의 여성은 의무실로 옮겨졌으나 곧 사망하였다. 그 후 그녀들의 행동에 동참해서 남성 정치범 감옥에서도 14명이 1112일에 음독을 시도하였고, 다음 날 다시 9명이 음독자살을 시도하여 6명이 사망하는 등 카라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듣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 러시아 여성의 놀라운 업적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카라의 비극은 혁명을 위한 순교자들과 성스러운 영웅들의 역사에서 새 장을 열 것이다.” 카라의 비극은 정치범들의 연이은 자살로 이어졌고 세계에 알려졌다. 정치범에게 무력과 체형을 적용하는 것에 항의하여 23명이 자살을 시도했다. 1889년 사건 보고서가 러시아 유력 신문과 유럽의 주요 일간지에 보도되었으며, 영국 The Times에도 두 편의 기사가 실렸다. 마침내 국내외 여론에 밀려 러시아 정부는 1893328일 자로 여성 죄수와 귀족에 대한 체형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1898년 카라 강제노동수용소는 폐지되었고 카라 금광에서는 형사범들과 자유 고용인들만 남게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니콜라이 카사트킨(1859~1930)이동전람회파화가 V. G. 페로프와 I. M. 프랴니시니코프의 제자였다. 작가 보리스 아쿠닌(1956~)은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이 그림은 영웅주의나 자기희생의 아름다움이 아닌, 죽음의 얼굴이다.”

'시기다(카라의 비극)' 부분화
'시기다(카라의 비극)' 부분화

 

시기다의 무서운 얼굴은 그녀가 경험한 끔찍한 고통의 결과라는 해석과 보리스 야쿠닌이 말한, 화가가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려낸 죽음의 얼굴이라는 해석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카사트킨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무 몸이 약해졌다. (...) 마지막 작품 시기다를 끝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했다. 실제로 화가는 19301217혁명 박물관에 전시된 카라의 비극을 설명하던 중 쓰러져 자신의 그림 옆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파벨 그라놉스키(1864~1902)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던 영혼의 울림(1888년 모스크바 이송 감옥에서 시기다는 혁명활동죄로 수감 되었던 파벨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는 18편의 시를 시기다에게 헌정했다)이었으며, 여성 혁명가들의 든든한 동지였던, 젊고 아름다웠던 27세의 시기다는 이렇게 죽음의 얼굴로 남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성 유형수가 감내해야 했던 모든 고통을 다 담아내고 있다. 매춘, 강간, 폭력, 폭언, 가혹한 환경 등을 지나 만나게 될 종착역이 거기에 있다.

 

| 김은희(한국외국어대학교 특임교수)

김은희 교수
김은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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