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풀잎은 사람보다 계절을 먼저 읽는다. 아침 일찍 산책에 나설 때면 무딘 감각의 더듬이를 꺼내 계절의 변화를 탐지한다. 베르네천 경사면에 무덕무덕 피어나 연초록 물결이 넘실거리는 아침. 이슬 맺힌 강아지풀이 손짓한다. 허리 굽혀 그윽한 눈길을 건네는데, 일교차가 커서인지 간밤에 내린 수정처럼 맑은 이슬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다. 저토록 많은 이슬방울을 끌어안고서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다소곳이 고개 숙인 강아지풀에 유독 마음이 간다.

베르네천 경사면에 군락을 이룬 강아지풀.
베르네천 경사면에 군락을 이룬 강아지풀.

 

강아지풀은 귀엽고 복슬복슬한 강아지의 꼬리를 닮았다. 이삭에 낱낱의 작은 꽃들이 촘촘히 모여 부드럽고 긴 털을 달고 있다. 강아지풀은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개와 이리의 꼬리를 닮아 개꼬리풀이라는 의미로 구미초(狗尾草)와 낭미초(狼尾草)로 부른다. 서양에서는 푸른 여우꼬리(Green foxtail)와 푸른 털풀(Green bristlegrass)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고양이 앞에 강아지풀을 흔들면 장난치며 재롱부리는 것을 보고 고양이풀(猫じゃらし, 네코자라시)로 부르는데, 고양이용 장난감으로 인조 강아지풀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강아지풀은 우리의 정서와 친근한 풀이다. 개망초와 바랭이와 함께 묵정밭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리지만, 아이들의 장난감이기도 하였다. 꽃이삭을 뽑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강아지를 부르듯이오요요, 오요요라며 좌우로 흔들면, 이삭은 보드라운 털을 세우고 몸을 흔들어 반응한다. 이삭의 줄기 방향을 몸쪽에 두고 흔들면 강아지처럼 팔목 쪽으로 달려오고, 반대로 놓으면 손가락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간다. 씨의 낟알에 붙은 털이 줄기의 반대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기 때문이다. 강아지풀은 씨를 품은 열매의 표면에 작은 털이 많아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게 되어 있다.

바랭이와 함께 자라는 강아지풀.
바랭이와 함께 자라는 강아지풀.

 

초등학생 때, 들판을 가다가 벼메뚜기와 풀무치가 후드득 뛰고 방아깨비가 풀쩍풀쩍 달아나면 잽싸게 잡아 장난감 삼아서 놀았다. 곤충 채집 상자나 페트병이 없었고 병이나 비닐봉지도 귀했던 시절. 강아지풀의 줄기를 쑤욱 뽑아 목과 가슴 부위를 줄줄이 꿰어 집으로 돌아와 양은 냄비에 넣고 볶아 간식거리로 삼았다.

흔히 강아지풀은 잡초나 들풀로 여긴다. 맛깔 나는 음식 재료나 대단한 성분을 지닌 약재는 아니지만, 더위로 생기는 열독(熱毒)을 풀어주고, 종기와 옴과 버짐은 물론, 충혈된 눈을 완화하는 치료제로 쓰였다. 9월에 뿌리를 캐어 말렸다가 삶아서 마시면 촌충이 없어지고, 상처와 버짐에 바르면 완화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흉년이 들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와 비슷하게 생긴 강아지풀의 씨앗을 쌀과 보리에 섞어 밥을 짓거나 죽을 쑤어 먹기도 했던 구황식물(救荒植物)이었다.

강아지풀의 꽃말은 동심(童心)’이다. 시인 목필균은 그의 시 강아지풀에서 “‘어린 아이의 마음이라는 꽃말로 찾아오는 강아지풀/ 목덜미를 간질이며 장난치던 친구들/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흔히 마주치는 사람이라도/ 다 반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풀밭에서 흔히 만날 수 있어도/ 키를 낮추고, 눈을 마주쳐야/ 강아지처럼 꼬리 흔든다라며 추억을 노래하였다. 이삭을 뽑아 들고 친구에게 몰래 다가가 귀나 목에 문지르거나, 서로 간지럼 태우며 놀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꽃을 덮은 털이 얇고 곧게 나 있어 보들보들한 촉감으로 코끝을 간질이며 놀기 좋았다.

2020년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이민 가족의 정착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가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고,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이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제이컵(스티븐 연)은 외할머니 순자(윤여정)에게 오줌을 먹인 아들 데이비드(앨런 김)를 나무란다. 똑바로 사과하라며 아버지가 회초리 가져오라는 불호령에 강아지풀을 가져오자 순자는 활짝 웃으며 "아이고, 똑똑한 놈. 잘했다. 잘했어. 네가 이겼다.”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강아지풀이 잔잔한 감동과 웃음으로 다가왔다.

영화배우 김옥빈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추모하는 절절함을 SNS에 남겼다. “어릴 적, 할머니가 시장 갈 때마다 몰래 안 들키게 숨어서 졸졸 따라다니다 시장을 다 보고 집에 갈 때쯤 하고 나타나면, 할머니가 놀래서 아이고 내 새끼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다 컸다며 궁둥이를 토닥토닥해 주었다. 난 세상 뿌듯한 얼굴로 강아지풀을 머리에 꽂고서 할머니 뒤를 집까지 또 졸졸 따라갔다.”며 할머니의 애틋한 정을 떠올리며, 강아지풀을 머리에 꽂았던 추억을 꺼내놓았다.

연초록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아지풀 모습.
연초록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아지풀 모습.

 

산책은 계절을 읽고 사색하기에 좋다. 따사로운 햇살이 서너 뼘 올라와 풀잎마다 알알이 맺힌 작은 이슬방울에 스며들어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아침. 강아지풀이 가만한 바람에도 살랑살랑 반응하며 일렁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바람을 즐기며 하늘거리는 강아지풀의 씨앗이 딴딴하게 영글어 간다. 씨앗은 겨울을 나는 멧비둘기와 참새와 오목눈이와 박새의 소중한 식량이 될 것이다.

베르네천과 까치울을 산책하며 강아지풀에 얽힌 추억을 하나둘 꺼내 읽는다. 들풀 가운데 유독 강한 존재감으로 잡초 이상의 매력을 지닌 강아지풀. 화려하거나 우아한 자태로 꾸미지 않는 수수함이 마음을 끈다. 우리네 정서에 깊이 드리운 강한 생명력과 친근함으로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빛바랜 사진 속의 내 모습처럼 풋풋함과 순수함이 서려 있다.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을 떠올릴 때면, 고향 언덕에 피어난 강아지풀이 산들바람 타고 나부끼듯 춤을 추었다.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햇볕에 날개를 말리다가 살랑거리는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 계절에 잊지 못할 추억 하나쯤 만들고 싶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베르네 천변의 강아지풀, 투명한 이슬방울이 아침햇살에 빛난다.
베르네 천변의 강아지풀, 투명한 이슬방울이 아침햇살에 빛난다.

 

| 김태헌 조합원(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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