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코텀의 ‘관계적 복지’

영케어러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영국이 20여 년 전 18살 미만 간병인을 영케어러라고 정의하고 지원 정책을 펼쳤습니다. 영국에서 영케어러는 부모 등 가족의 돌봄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 18살 미만 간병인을 뜻합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사회적 지지와 도움 없이 홀로 돌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영케어러들이 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청년이 뇌졸중 아버지를 방치해 살인죄를 받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치료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비가 없어서 퇴원해야 했습니다. 청년은 그동안 수술비와 병원비를 감당하기에 벅찼고, 가스, 전기, 통신 등이 연체됐습니다. 쌀을 살 수 있는 돈까지 떨어졌죠. 청년은 아버지 간병을 포기했고 고의적 방치로 살인죄가 적용됐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최근 젊은 간병인 영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고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붕괴를 생각했습니다. 청년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 누구도 몰랐다는 것 그 자체에 주목해 봤습니다. 우리는 누가 굶고 있어도 아무도 모르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나서서 신청하지 않으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청년은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으니 정보에서도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의 사회활동가이자 사회적기업가 힐러리 코텀은 복지에 관계를 넣어 관계 중심의 새로운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관계가 사라진 복지 시스템은 그저 하나의 서비스 목록의 집합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힐러리는 한 사람이 70개가 넘는 여러 종류의 복지서비스를 받으면서도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연구했습니다. 복지기관의 담당자가 하는 일의 86%가 시스템 관리이고 나머지 14% 정도만 사람을 만나는데, 그마저도 자료와 정보를 모으는 대화만 오간다는 것입니다.

힐러리 코텀
힐러리 코텀

 

그래서 힐러리는 변화를 원하는 한 그룹과 복지 서비스의 대전환을 시도해 봅니다. 그들 일의 80%를 사람을 만나는 데에 쓰도록 하고, 복지 예산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누구는 자신에게 주어진 예산으로 가족과 저녁밥을 사 먹으면서, 깊은 대화를 했고, 어떤 가족은 집을 가꾸는 데 썼고, 또 누군가는 사회적기업을 만드는 데 썼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고 성과를 이룬 것이죠.

힐러리는 관계가 비용이 많이 드는 사회 서비스를 대체할 수 있게 해주고,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관계는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과 행복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실업 문제도 관계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일자리를 얻기도 하는데, 정작 진짜 일이 필요한 실업 청년들은 그런 관계와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어 있습니다. 실업 문제 해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죠.

힐러리가 개발한 사회서비스는 서로를 연결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사람들이 실질적인 관계를 맺도록 해주고,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서로 돕게 만들어 줍니다. 전구를 갈아줄 사람,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누군가 함께 있어 주는 것.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 활동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관계 맺음을 해줌으로써 서로가 원하는 복지와 돌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간병을 포기한 청년. 청년은 돌봄을 함께 감당해 줄 관계와 공동체가 절실했을 것입니다. 현재의 기관 시스템 중심 복지 시스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베버리지가 최후에 남긴 보고서에 본인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복지에 사람과 공동체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죠. 흡연보다 더 심각한 사망 원인이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돕는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 때입니다. 복지에 관계를 더하면, 비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새로운 복지와 돌봄의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 이선주 조합원(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전무이사)

이선주 조합원
이선주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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