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학교 이야기

모올반은 1학년, 2학년이 함께 있는 반이다. ‘모두가 올 수 있는 반을 줄여서 모올반인데, 교실에는 1, 2학년뿐만 아니라 나비, , 사슴벌레, 애벌레가 함께 산다. (사실 이들은 아이들로 인해 자주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하곤 한다) 어느 날 교실 바닥에 마스킹 테이프로 사방치기를 그려놓으니 3학년, 4학년 심지어 커다란 6학년이 와 큰 몸으로 펄쩍펄쩍 뛰며 사방치기를 하기도 한다. 이름처럼 모올반은 모두가 와서 편히 쉬고 놀고 하는 공간이 됐다.

처음 1, 2학년을 맡게 되었을 때 저학년 아이들에겐 무엇이 필요한지, 오래 고민하였다. (사실 이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아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지식은 금방 새로운 것들로 바뀌지만 태도와 습관은 오랫동안 삶에 녹아 있기 때문에 저학년 시기에 좋은 습관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힘들지 않게, 매일 조금씩 해보는 활동으로 <매일 매일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그중에서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매일 책 읽기>.

매일 책 읽기는 2학년 아이들이 수업 시간이 아닌 집에서 하는 숙제다. 3, 아이들에게 왜 매일 책을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같이 하자고 설득하기 위해 허접한 실력이지만 그림을 그려 안내문을 만들기도 했다. 매일매일 책을 읽으면 나만의 필살기가 생긴다고 뻥을 쳤더니 아이들이 웃으면서 좋아!”했다. 앞으로 자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3월부터 지금까지 아이들과 여러 방법으로 책 읽기를 했는데, 그 방법을 필살기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배추흰나비와 하린이
배추흰나비와 하린이

 

필살기 1. 소리 내서 책 읽고 녹음하기

집에 있는 책을 골라 소리 내서 읽으면 글자를 꼼꼼하게 읽을 수 있는 필살기가 생긴다. 글자를 꼼꼼하게 짚으며 읽는 것은 밥을 꼭꼭 씹어 먹는 것과 같다. 꼭꼭 씹어야 어떤 맛인지 알고, 느끼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다. 2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한글을 알기 때문에 ㄱ, , ᄃ을 배울 때의 올챙이 적을 금세 까먹고, 책 이야기를 훑어보듯 쓱 볼 때가 많다. 아이들이 책 이야기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려면 빨리 읽는 것보다 천천히 꼼꼼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책은 길지 않기 때문에 소리 내서 책을 읽어도 5분이면 한 권을 다 읽는다. 하루에 책 한 권을 다 읽는다는 성취감도 얻을 수 있고 아이들의 귀여운 목소리가 담긴 녹음파일은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시작이 없다.

책읽고 줄거리 쓰는 산희와 그 옆에 율이와 은성이
책읽고 줄거리 쓰는 산희와 그 옆에 율이와 은성이

 

필살기 2. 질문지 쓰기

그림책을 충분히 읽고 소리 내서 책을 읽지 않아도, 아이가 글자를 꼼꼼하게 읽는 습관이 잡혔을 때 레벨 업이 필요하다. “나는 이제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야!”라며 그림책이 시시하다는 아이들의 반응에 그림책에서 이야기책으로 책을 바꾸었다. 80~100쪽 정도 되는 이야기책을 일주일로 나눠 읽는데, 이때부터는 소리 내서 읽지 않고, 마음속으로 책을 읽는다. 소리 내서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야호!” 환호하지만, 책을 읽고 질문지를 써야 한다고 하니 아이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때부터 교사는 아이들의 눈빛을 모른척하기 시작한다. 질문지에는 책 속 이야기를 묻는 질문과 아이의 생각과 경험을 묻는 질문이 있다. 생각과 경험을 묻는 열린 질문엔 아이들이 몰라”, “아니”, “등 단답형 스킬을 쓰기 때문에 질문지에는 꼭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써주세요.”가 필수다.

책읽고 질문지 쓰는 은성이
책읽고 질문지 쓰는 은성이

 

필살기 3. 시 쓰기

아이들의 글이 길어지면서 글자 쓰는 연습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었던 시를 나눠주고 칸 공책에 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꼭꼭 씹듯 책을 읽었던 것처럼, 꼭꼭 씹듯 또박또박 글자를 쓸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2주 정도 칸 공책에 쓰기 연습을 하고 난 후 글씨 쓰기가 익숙해졌을 때 칸이 없는 공책에 시를 필사했다. 거기에 시를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도 했다. 같은 시지만 아이마다 그림이 달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필사와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시를 느끼고 표현하는 필살기를 만드는 좋은 방법 같다.

책읽는 민준이
책읽는 민준이

 

필살기 4. 줄거리 쓰기

매일 책 읽기는 교사가 매일 숙제를 확인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아이들이 집에서 숙제를 하기 때문에 교사는 녹음파일, 아이들 쓴 질문지, 시를 쓴 공책을 보며 아이들과 함께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교사가 숙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아이들도 숙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앞두고 고민이 생겼다. 방학 때는 내가 매일 숙제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공책에 책을 읽고 읽은 만큼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요약해 쓰는 것으로 숙제를 정했다. 나중에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줄거리를 어떻게 쓰는지 몰랐다고 할까 봐 여름방학이 되기 전 일주일을 매일 책을 읽고 줄거리로 요약해서 쓰기를 연습했다. 아이들은 나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책 읽는 유하
책 읽는 유하

 

필살기 5. 즐겁게 책 읽기

어느 날 줄거리 쓰기를 한참 하고 있을 때였는데, 책을 받는 아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책을 받을 때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해하기보다 큰 돌멩이를 억지로 받는 것 같았다. 이 돌멩이가 아이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다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책 읽는 좋은 습관을 길러주긴커녕 책 읽기 자체를 싫어하게 될까 봐 아차 싶었다. 나는 다시 책 읽기 숙제를 바꿨다. 책 중에 <병만이와 동만이 그리고 만만이> 시리즈가 있다. 아이들 마음을 짓눌렀던 질문지나 줄거리 쓰기는 다 없애고 편하게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엄마나 아빠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한 문장이어도 괜찮고, 책을 읽고 생각난 자기의 이야기여도 좋고, 다 좋다. 그냥 책을 읽고 이 책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수다를 떨면 된다. 아이들은 재밌었던 장면을 키득키득 웃으며 설명하기도 하고, 신기했던 장면엔 눈이 커지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설명한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시간이 1, 3분이었다가 지금은 10분 어떨 때는 20분이 넘어가기도 한다. 아이들이 점점 이야기꾼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도 아이들도 즐겁게 책 이야기를 나누는 요즘이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소개할까? 서점을 기웃기웃하다가 돌아왔다. 아이들 덕분에 나도 매일 조금씩 책을 읽고 있다. 나도 필살기가 조금 생긴 것 같다.

함께 책읽는 모올반 아이들
함께 책읽는 모올반 아이들

 

| 노을(산학교 교사)

 

*산학교는 공동육아의 철학과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초,중등 9년제 대안학교입니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