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우리나라 법보사찰(法寶寺刹)을 대표하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로 국립공원 가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문위원 역량강화 연수>를 경남 합천으로 간다고 하여 합천도 처음이지만 생애 최초로 고려 팔만대장경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기뻤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책을 통해 알 수도 있지만 직접 답사를 통해 눈으로 확인하면 오래 기억할 수 있고 그 유적을 중심으로 다시 연관된 다양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은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과 황매산 영암사지 그리고 합천영상테마파크 방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둘째 날은 오롯이 가야산과 소리길 탐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해인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정인조 회장님과 같은 호텔 방에서 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새벽 540분에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초행길이고 어두운 새벽이라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회장님께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셔서 수월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의 불빛에 의지해 가는데, 곳곳에 멧돼지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어 약간은 무서웠습니다.

산사의 새벽은 언제나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도량에 울려 퍼지는 스님의 예불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며 울리는 풍경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 줍니다. 7km 이상 펼쳐져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 물소리 또한 최고입니다. 해인사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해인사의 이름은 해인삼매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에 비치는() 경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해인사에 오면 세상에서 받던 온갖 고민과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마음의 평정이 유지되어 참다운 나의 모습과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에 의해 신라 제40대 애장왕 3(802)에 창건되었으므로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만큼 해인사에는 국보와 보물을 비롯한 70여 점의 유물과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국보 제32호 고려 팔만대장경을 들 수 있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고종 19(1232)에 불타자,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崔瑀) 등은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팔만대장경을 완성하였습니다. 불심을 통해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자는 조상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형이 보존되면서 경판이 부패하거나 벌레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문화재 제작기술의 경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려 팔만대장경뿐만 아니라 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장경각(장경판전) 또한 대단합니다.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첨단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팔만대장경 보관의 원리를 다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대장경 보관소의 북향과 남향의 벽 구조, 창문 크기, 처마 모양, 심지어 바람 통로가 다른데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해와 달, 비와 바람, 자연과 인간의 조화, 부처님에 대한 인간의 정성의 결정체가 팔만대장경과 장경각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해인사와 평화통일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불교를 흔히 호국(護國)불교라고 합니다. 외세가 침입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스님들은 승병이 되어 의병들과 함께 외세를 몰아냈습니다. 해인사에서 사명대사, 용성선사, 김영환 장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평양선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우셨으며,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왜란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오시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해인사 홍제암에 사명대사 부도와 석장비가 있습니다. 비석은 1612년에 건립되었는데 194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깨뜨렸으며 1958년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도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활약상을 400년이 지났음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용성선사(龍城禪師, 18641940)는 전북 장수군 번암(옛 남원, 남원의 옛 이름이 龍城)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셨으며,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불법에 귀의하여 민족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대각사를 창건하시고 대각교를 창설하셨습니다. 이후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시고 불경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해인사 용탑선원에 용성선사 부도와 탑비가 있습니다.

김영환 장군 공적비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영환 장군은 6.25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면서 '무장 공비가 주둔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김 장군은 당시 명령 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 직전 위기까지 몰렸다가 공군 참모총장 탄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하니 한 군인의 올바른 판단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그 소중함이 더해집니다.

이처럼 해인사의 다양한 문화재와 역사유적을 통해 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만날 수 있으며, 국난 극복을 위해 헌신하신 의병과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해인사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사찰, 문화재,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세월의 역사를 음미함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한반도의 평화와 교류에 대해 생각하게 할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 ()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박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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