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학교 이야기

우리 집 아홉 살 어린이는 산학교 2학년이다. 생활 교사(담임 교사)와 학부모들이 줌(ZOOM)으로 만난 첫 간담회에서 노을(1, 2학년 통합반 생활 교사)꾸준한 책 읽기가 올해의 교육 목표라고 발표하였다. 나를 비롯한 아빠·엄마들은 반색하며 좋아했다. 공부와 상통하는 책 읽기를 마다할 대한민국 부모는 없었던 것이다.

 

#: 또박또박 쓰다

1학년 말과 글수업으로 겹받침까지 익힌 어린이들이었지만 글씨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쓰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었나 보다. 노을은 아이들에게 숙제로 시 쓰기를 내주셨다. 선생님이 하루에 한 편의 를 나눠주면, 깍두기 노트에 그대로 적어가기. 우리 집 어린이가 친구 집에 마실을 가거나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마실을 왔을 때 놀다가도 숙제는 필수였다. 친구와 작은 머리를 맞대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글자를 꾹꾹 눌러쓰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감동이자 즐거움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갓난아기에서 아장아장 걷고, 말을 배우고, 자아가 성장하며 싫어! 아니! ?’라고 말하던 때가 시간순으로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가끔 부모들 단체 카톡방에는 오늘 숙제 좀 올려주세요.’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미처 숙제를 챙겨오지 못했지만 매일 빼먹지 않고 숙제를 하려는 어린이의 마음과 숙제를 하게끔 하려는 부모들의 마음이 담긴 간절한 메시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간절함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적극적으로 답해주었다. 뉴스 기사나 읽는 메마른 마흔 줄의 어른들이 동시를 읽으며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것은 덤이었다.

 

#여름 : 책거리를 하다

봄과 여름을 보내며 읽은 책이 여러 권 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책거리를 하기로 했단다. 책거리 장소는 우리 집으로 정해졌다. 책거리 장소를 모색하는 중에 우리 집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이사하며 새로 생긴 자기 방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책거리 날. 오후 5시쯤이 되자 아이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고기 없는 월요일’(산학교의 월요일 급식 식단에는 고기가 없다. 인간의 건강과 지구의 건장을 함께 지키는 국제적 캠페인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각 가정에서도 월요일에는 고기 섭취를 지양하고 있다.)이라 원하던 치킨을 눈물로 포기하고 대신 떡볶이와 튀김, 야채김밥을 사 들고.

한바탕 먹고 이방 저방 뛰어다니며 놀다가 퀴즈 맞히기를 하였다. 벽 한쪽에는 문제 유출을 철저히 막고자 문제가 적힌 종이를 둥글게 말아 손에 든 노을이 앉았고. 반대편 벽에는 우르르 몰려왔던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앉았다. 노을은 지금까지 읽었던 4~5권의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줄거리에 관련된 퀴즈를 내기 시작했고, 장학 퀴즈에 출연한 학생들처럼 2학년 어린이들은 퀴즈가 나오는 족족 정답을 맞혔다. 상품으로 서른 한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거머쥔 아이들에게 이날은 1년 중 기억에 남을 진한 추억이 되었을 테다. 물론 호스트였던 나에게도 그랬다.

 

#가을 : 사고의 유연함을 배우다

잠자리에 나란히 누웠는데 어린이가 벌떡 일어난다. “어떡해. 나 숙제 안 했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울먹인다. 나는 졸리니 오늘은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하면 된다고 달랜다. 숙제를 하지 못하고 등교하는 생각에 불안한지 아이는 불을 켜고 숙제를 하고 자야 한다고 징징거리며 버틴다. 하지만 졸린 눈꺼풀을 이길 도리는 없어 보인다. 곧은 성격에 숙제를 마치고 자야 마음이 편하겠는데 졸음을 쫓지도 못하겠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이 상하고 화가나 짜증을 낸다. 어르고 달래고 또 단호하게 꾸짖어 겨우 잠을 재운 적이 두 번쯤 있었다. 한번은 아침에도 늦게 일어난 탓에 교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기회를 얻어 하루 늦게 숙제를 하였고, 또 한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숙제를 마치고 당당히 등교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늦은 밤에 숙제를 미처 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어린이의 대응은 진화하였다. 분량을 반으로 나눠 반은 늦은 밤에 읽고, 다음 날 아침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나머지 반을 읽는 방식으로. 그러니 짜증 내지도 징징거리지도 울지도 않게 되었다. 매일 주어지는 책 읽기 숙제는 글을 읽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능력을 당연하게 시나브로 쌓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과 사고의 유연함까지 터득하게 해준 듯했다.

시 필사하는 민준이와 율이
시 필사하는 민준이와 율이

 

책과 함께 봄, 여름, 가을을 보내며 2학년 어린이들에게 책 읽기는 습관이 된 듯하다. 부모로서 얻은 것도 많다. 우선 어린이와 나눌 대화 소재가 많아졌다. <병만이와 동만이 그리고 만만이> 시리즈를 읽었을 때는 만만이가 어른이 되어서 똥꼬에서 피가 났어. 그래서 팬티를 입혔어.”라는 말에 월경에 대해 자연스레 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부모들과도 소통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질문지에 우리 집 어린이가 이거먹어임미다.’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부모들과 공유하며 같이 웃기도 했다. 다른 집 어린이와 책 읽기 에피소드도 종종 회자 되었다.

산학교에 입학하기 두 해 전에 참여했던 입학설명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산학교에서는 어린이의 성장 과정을 부모와 교사가 경이롭게 바라본다.’였다. 아홉 살 어린이가 글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갔던 봄, 앞다투어 손을 들고 퀴즈를 맞히는 여름날의 책거리, 숙제라는 난관에 눈물 바람을 하고 또 계획적으로 해결해 보았던 가을. 이 세 계절 동안 나는 산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우리집 어린이를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 산학교 학부모 토마토(채은경)

 

*산학교는 공동육아의 철학과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초,중등 9년제 대안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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