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권의 날’ 특집 기고
지난 6월 말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정년퇴직하였다. 무얼 할까 생각하다 부천에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강남시장 동문 앞에 이주민법률지원센터를 열었다. 8월 초 개소 이후 소송을 대리한 첫 번째 사건은 한국 국적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A국 여성의 비자 사건이었다. 이 여성은 한국으로 시집온 친언니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언니의 육아를 돕던 중 인터넷으로 본인을 미혼이라고 소개한 한국 남성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1년여 동안 사귀던 중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남성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자 이 남성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연락을 딱 끊어버렸다. A국은 국민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나라로 이 나라에서는 낙태가 신에 대한 죄악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산모들은 웬만해선 낙태를 생각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여성도 결국 언니 부부의 도움으로 혼자서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이 여성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은 출생신고였다. 출생신고에 부(父)를 기재해야 하는데 상대방 남성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관련 단체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친부 상대로 인지 소송을 해서 어렵사리 출생신고를 하였다. 다음 관문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한국 체류자격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한국에 올 때 이 여성이 받은 체류자격은 방문초청비자로 유효기간이 1년짜리였다. 반복 갱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1년을 초과하여 체류할 수 있었지만,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1년짜리 비자를 갱신하는 방법으로 버티기는 어렵다. 또한 이 비자로는 취업이 안 되기 때문에 아이를 키울 수도 없다. 아이가 있는 마당에 언제까지 언니 집에서 얹혀살 수는 없다. 독립해야 하는데 그러면 생계비를 벌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 여성은 OO출입국외국인청에 취업이 가능하고 최대 5년까지 체류가 가능하여 안정적으로 아이 양육을 할 수 있는 거주 비자로 변경해 달라고 신청하였다. OO출입국외국인청은 신청 후, 한 달 만에 사유 설명도 없이 불허가 결정을 통지하였다. 이 여성은 현재 조건부 수급자 자격을 인정받아 한 달에 90여만 원의 생계급여와 20여만 원의 주거급여, 아동수당 10만 원, 의료급여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차선책으로 비자 변경이 안 되면 현재의 비자로 남아있을 테니 취업이라도 할 수 있게 체류 목적 외 활동을 허가해달라고 신청하였다. 접수담당자는 이 여성이 허가신청을 하겠다고 하자 사정이 딱하니 긍정적으로 검토한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난 뒤 체류 목적 외 활동 허가도 어렵다고 통지가 왔다. 역시 이유 설명도 없었다.
「헌법」 제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고 규정하고,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가족들이 분리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가족 결합권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1991년에 비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제9조 제1항은 “행정당국이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 외에는 아동의 의사에 반하여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아니하도록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과 아동 권리협약의 취지를 이어받아 「아동복지법」 제4조 제3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게 아동이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을 의무로 정하고 있다. 이 규정들을 종합하면 국가는 아동의 이익과 발달을 위해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와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부모로부터 분리하거나 분리할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할 강력한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
OO출입국외국인청이 두 개의 신청을 모두 거부한 상황에서 이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는 지금 같이 1년짜리 비자로 한국에 불안한 상태로 체류하면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수급비로 근근이 생활하다가 비자 연장이 거부되면 아이와 함께 A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가 커가고 한국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복잡하게 형성될 텐데 이를 끊고 A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힘들어질 것이므로 선택에 어려움이 있다. 다른 방법은 아이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에게 떠넘기거나 한국 거주 아이 이모에게 사정하여 아이를 맡기고 이 여성만 A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국가가 엄마인 이 여성에게 사실상 아이유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국가는 외국인들이 함부로 우리나라에 드나들거나 체류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없도록 통제하여 출입국질서를 유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어떤 사람이 어떤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체류할 수 있는지 결정할 때 출입국 질서유지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 헌법에서 인정하는 가족 결합권도 보호해야 하며, 아동 권리협약이 규정한 바와 같이 ‘행정당국에 의하여 실시되는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국가는 외국인 출입국 업무를 할 때 이와 같이 서로 상충하는 법익들의 조화로운 균형점을 잘 찾아 국민에게 가장 이로운 결정을 할 의무가 있다.
OO출입국외국인청이 이 여성의 신청을 거부함으로써 아이와 엄마를 불안정하고 빈곤한 환경에서 살게 하거나, 한국 국적의 아이를 A국으로 내쫓거나 또는 모자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는 것이 과연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일까? 최근에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국내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로 경제 규모와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해서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더 균형적이고 지혜로운 시각을 갖춘 선진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글 | 김원규 변호사(부천 이주민법률지원센터 '모모' 센터장)
*‘세계 인권의 날(Human Rights Day)’은 1948년 12월 10일에 열린 국제 연합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국제인권기념일’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