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 심리’ 8

외로운 사람에게 사랑은 강력한 유혹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첫눈에 반한 여인과 결혼한 화가가 있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드라마틱한 사랑의 주인공이다. 22세의 그는 14세의 벨라를 보자 첫눈에 반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붉은빛을 띤 주홍색 스칼렛(scarlet)으로 사랑하는 벨라를 그렸다.

필자는 미국의 영화 노팅힐(Notting Hill)의 흔적을 따라 몇 년 전 노팅힐 서점을 찾았다. 로맨틱한 만남을 꿈꾸며 서점을 두리번거렸지만,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화에는 샤갈의 작품이 나온다. 미국의 슈퍼스타 애나와 런던 노팅힐의 작은 여행 전문서점 주인 윌리엄은 우연히 스친 짧은 만남에 강한 호감을 느낀다. 이혼남인 윌리엄은 대스타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 다가가지 못한다. 6개월 후, 스캔들에 휘말려 고통스러워하던 애나가 윌리엄을 찾아간다. 애나는 식탁 벽에 걸린 샤갈의 작품 신부의 이미테이션 포스터를 보고 샤갈의 그림은 하늘로 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라고 말한다.

 

마르크 샤갈, 「신부(The Bride)」, 68x53cm, 1950, 파스텔과 과슈
마르크 샤갈, 「신부(The Bride)」, 68x53cm, 1950, 파스텔과 과슈

 

1950년 샤갈은 하늘로 나는 듯한 사랑의 기쁨을 그렸다. 작품 신부에 하얀 면사포를 쓰고 스칼렛 색상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들고 있는 신부를 그렸다. 신부를 소중하게 껴안은 신랑은 꿈같은 사랑에 취해 푸른 하늘로 두둥실 나는 것처럼 보인다. 염소가 결혼을 축하하는 첼로 연주곡이 울려 퍼지는 동화 같은 작품이다. 스칼렛은 염색 기술이 발달했던 중세에 결혼식 드레스 색상으로 사랑받았다. 유럽의 곳곳과 샤갈의 고향에는 결혼식에 아름답고 화려한 스칼렛 드레스를 입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감미로운 첫사랑과 입맞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샤갈은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신 배경과 집안의 경제력 차이로 벨라의 부모는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샤갈은 성공을 다짐하며 유력자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났다. 모더니즘을 접하고 마티스와 피카소 등과 교제하며 파리의 매력에 흠뻑 빠졌지만, 상사병을 앓다가 유학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28세 생일에 벨라가 꽃다발과 케이크를 들고 화실로 찾아왔다. 검은 드레스로 차려입은 매력적인 그녀를 보고 와락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1915년 그의 작품 생일(The Birthday)에 캔버스 위를 무중력 상태로 두둥실 떠다니는 화가의 기쁨을 그렸다. 주홍으로 물든 양탄자와 테이블과 침대의 색감에 그녀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담겨있다.

 

마르크 샤갈, 「생일」, 99.5x80.5cm, 1915, 캔버스에 유채
마르크 샤갈, 「생일」, 99.5x80.5cm, 1915, 캔버스에 유채

 

1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기에 결혼한 샤갈은 벨라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예술의 꽃을 활짝 피웠다. 나치 정권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지만,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갖은 어려움을 사랑으로 꿋꿋이 견뎌냈지만, 1944년 가을, 벨라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절망에 빠진 샤갈은 붓을 놓고 자신이 그린 모든 그림을 벽면으로 돌려놓을 만큼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첫사랑과 결혼하여 일편단심 30년 동안 벨라만 바라보았던 그는 "평생토록 그녀는 나의 그림이었다."라는 문구를 그녀의 묘비에 새겼다. 그리운 벨라를 그리며 힘겹게 노년을 극복한 샤갈은 재혼하고 98세까지 장수했지만, 그림의 뮤즈는 언제나 벨라였다.

 

행복한 샤갈과 벨라
행복한 샤갈과 벨라

 

필자에겐 샤갈처럼 헤어짐의 아픔을 행복으로 바꾼 친구가 있다. 유리는 같은 남자와 두 번 결혼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국비유학생으로 유럽의 음악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합창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스칼렛 컬러를 좋아했던 그녀는 합창단의 단원인 미남과 사귄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결혼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짧은 만남과 충동적인 결정을 걱정하였는데, 반년쯤 지난 어느 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추리닝 차림으로 필자를 찾아왔다. 학벌과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로 힘들었던 결혼 생활을 하소연하며 울고 불면서 통곡했다.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매일 밤 괴로워하다가 결국, 이혼했다.

일 년이 지난 후, “너무 외로워서 지쳤어. 나에게 강하게 매달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어.”라며 헤어진 남편과 재혼하겠다고 했다. 마땅한 직업이 없던 남편을 변화시켰다. 끊임없이 설득하여 자존심을 내려놓고 환경미화원에 지원토록 하여 당당히 합격시켰다. 꼭두새벽부터 청소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몇 년 동안 살뜰히 저축하여 직장을 그만두고 피트니스 센터를 열어 지금은 오붓하게 잘살고 있다.

 

마르크 샤갈, 「에펠탑의 연인들」, 66.3x50.6cm, 1960, 컬러 리도그래피
마르크 샤갈, 「에펠탑의 연인들」, 66.3x50.6cm, 1960, 컬러 리도그래피

 

스칼렛에는 수난의 역사가 스며있다. 14세기 유럽은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여온 고가(高價)의 주홍빛을 띤 붉은색 염료로 만든 천을 스칼렛 컬러로 불렀다.

권위의 상징이 된 스칼렛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성모마리아와 순교자의 색이었고, 왕족이나 귀족과 고위 성직자만 입을 수 있는 색이었다. 유럽에 라피즈 라줄리(청금석)로 만든 파란색 염료의 선풍적인 인기와 16세기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스칼렛은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색으로 추락하였다. 사치 금지법으로 특별한 날 외에는 착용이 금지되었다. 성경 이사야서 제1장에 너희 죄가 주홍(스칼렛) 같을지라도라는 구절처럼 스칼렛은 죄(sin)를 상징하였고, 매춘 여성은 가슴에 스칼렛 색깔의 글씨를 달았다.

1850년 너새니얼 호손은 소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서 17세기 청교도의 죄(Sin)와 위선을 통찰력 있게 그렸다. 미국 보스턴의 청교도 사회가 간통을 저지른 여주인공에게 주홍색 스칼렛 컬러의 알파벳 A를 가슴에 달게 했다. 이니셜 A는 간음을 뜻하는 영어 단어 Adultery의 약자다. 오늘날은 개인한테 가해진 가혹한 편견이나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로 해석한다.

사랑과 열정을 뿜어내는 스칼렛 컬러는 몸의 활동력을 자극하고 자신감을 북돋운다. 피곤하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 스칼렛을 가까이에 두면 기운이 난다. 내성적인 사람이 의사 표현할 때도 도움 되며, 타인에게 의욕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랑을 고백할 때 사용하면 효과적으로 정열적인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 스칼렛 색상은 신문이나 잡지 등의 간행물과 웹 디자인이나 웹 광고에서 강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항목에 사용한다. 때론, 위험과 경고를 알리고 질투와 분노를 나타내는 색으로 인식한다.

 

 

충동구매를 자극하는 스칼렛 컬러는 롯데리아 등 입맛을 돋우는 음료나 음식 브랜드에서 선호하는 색이다. 2021년 디올 가 뷰티 시그니처 아이템인 디올 어딕트 립 글로우(Dior Addict Lip Glow) ‘서울 스칼렛컬러를 우리나라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아 출시했다.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4인조 K-POP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인 지수가 디올의 뮤즈로 활동하고 있다.

스칼렛은 강한 마력의 컬러다.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하여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친다. 혈압이 상승하고 호흡과 맥박이 빨라지며 노여움이나 성적 욕구와 충동을 유발한다. 신경이 날카로울 때는 스칼렛 색을 너무 가까이하면 공격적인 성향이 짙어질 수 있다.

필자는 올해 12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샤갈특별전을 관람했다. 성경의 사랑을 전하는 판화가 대부분이었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녹색과 스칼렛 색상이 어우러진 작품 투르넬 강변과 사랑하는 커플을 불타는 태양 안에 그린 에펠탑의 연인들이 인상 깊었다.

 

마르크 샤갈, 「투르넬 강변(파리를 향한 시선)」, 39x60cm, 1960. 컬러 리도그래피
마르크 샤갈, 「투르넬 강변(파리를 향한 시선)」, 39x60cm, 1960. 컬러 리도그래피

스칼렛은 사랑의 메신저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계절에 아름다운 사랑이 선물처럼 찾아오기를 소망해보자.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지만, 독자의 마음속에 스칼렛 색깔처럼 뜨거운 사랑이 잉걸불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 김애란 조합원(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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