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 심리’ 9

법관의 자주색 법복은 권위와 품격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헌법재판관은 Y자형의 짙은 자주색 벨벳 단을 두른 법복을 입는다. 자주색은 지성을 상징하는 짙은 파란색과 용기와 열정을 상징하는 빨간색의 혼합색이다. 미국 현대미술의 자부심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법률가를 꿈꾸던 그는 가난과 인종 차별을 딛고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 자줏빛 크림슨(crimson) 컬러처럼 열정과 지성을 겸비한 삶을 살았다.

마크 로스코는 1903년 러시아 드빈스크(현재 라트비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유대인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이민자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 법학을 공부하고 싶어 예일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유대인에 대한 차별로 장학금 연장이 취소되어 2학년 때 자퇴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방황하던 중 친구를 만나기 위해 뉴욕의 미술학교 ASL(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 갔다. 그림이 운명처럼 느껴져 2년간 미술을 공부한 로스코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었다.

 

마크 로스코, 『무제 Untitled』, 1959, 테이트 모던 갤러리, 씨그램 벽화 연작
마크 로스코, 『무제 Untitled』, 1959, 테이트 모던 갤러리, 씨그램 벽화 연작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의 리더가 되었으나, 유럽의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다. 미국 정부는 연방 미술 프로젝트를 세우고 재계와 정계가 힘을 모아 미술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에 힘입어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레제, 몬드리안, 샤갈, 달리 같은 화가들이 뉴욕에 모여 다양한 형식의 장르를 시도하며 예술의 꽃을 피웠다.

마크 로스코는 잭슨 폴록, 바넷 뉴만 등과 함께 성난 화가 18을 조직했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미술시장에 격하게 항의하였다. 로스코는 전쟁의 여파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세대를 회색빛 뉴욕의 거리로 표현했으나, 점차 아름답고 감동적인 내면의 가치를 추구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보다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에 집중했다. 그림에서 형상이 사라지고 노랑, 분홍, 연두, 주황 같은 색깔만 남았다. 니체의 철학에 심취했던 그는 인간의 비극과 운명과 황홀경 같은 감정을 중시하며 두세 가지의 색깔로만 2m가 넘는 대형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이런 그림을 추상표현주의(abstraction expressionism)라고 부른다. 1950년 전후로 명성을 떨치던 로스코는 베니스비엔날레에 미국 대표로 참가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초대받을 정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Mark Rothko(1903 ~ 1970), 출처(위키백과)
Mark Rothko(1903 ~ 1970), 출처(위키백과)

 

1958년 그는 세계적인 주류회사 씨그램(Seagram)과 거액의 계약을 맺었다. 200만 달러를 받고 뉴욕의 본사 1층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인 포시즌즈(Four Seasons)의 장식을 위해 벽화작품 무제 Untitled40여 점을 제작했다. 기득권층에 거부감이 강했던 로스코는 거들먹거리는 고객들이 작품을 보면 입맛이 싹 사라질 정도로 진한 크림슨 컬러로 색칠했다. 레스토랑 고객들이 작품에서 숭고한 감정을 느끼고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이, 고객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장식품이 되어버린 것을 안 로스코는 분노하여 계약을 파기했다. 작품비를 돌려주고 40여 점의 작품을 회수하여 1970년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기증했다.

몇 년 전, 필자는 현대미술의 메카로 알려진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Tate Modern Gallery)를 방문했다. 영국은 2천 년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템즈 강변의 폐기된 화력발전소를 내부만 리모델링하여 갤러리로 탄생시켰다.

 

마크 로스코, 『무제 Untitled』, 264.8x252.1cm, 1958, DIC가와무라 미술관, 씨그램 벽화 연작
마크 로스코, 『무제 Untitled』, 264.8x252.1cm, 1958, DIC가와무라 미술관, 씨그램 벽화 연작

 

로스코는 관객과 작품의 적당한 감상 거리가 45cm라고 했다. 2층에서 여러 점의 벽화작품 무제 Untitled를 만났다. 붉은 크림슨으로 가득한 거대한 캔버스에 압도당하여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크림슨의 강렬한 울림이 내면에 깊이 숨겨진 감정을 자극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림슨의 무한한 공간 속으로 몰입할수록 지난 시간의 희로애락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나를 돌아보면서 깊이 회개하고 새롭게 살아갈 용기도 얻었다.

방탄소년단의 RM(김남진)이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에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1964년 석유 재벌 드 메릴에 의해 건축된 로스코 채플은 2001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생애 한번은 방문해야 할 가장 평화롭고 신성한 장소로 선정되었다. 십자가도 없고 신부도 없으며 오직 로스코의 거대한 작품 14점과 4개의 미완성작만 걸려있는 갤러리이자 예배당이다. 여타 종교와 인종과 문화를 통합하는 영혼의 안식처로 관람객은 작품에 둘러싸여 명상하거나 영적인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2014년 세계미술 경매시장에서 로스코의 작품 No 6 바이올렛, 그린 그리고 레드(1951년 작)18,600만 달러(한화 2,170억 원)에 낙찰되었다. 슈퍼 컬렉터들이 선호하는 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로스코는 1970,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 큐레이터 캐서린 쿠는 그토록 비난했던 기득권자가 되었다는 갈등과 아내와의 이혼 및 젊은 팝아트 작가와 비교되는 것에 분노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No. 6 (Violet, Green and Re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No. 6 (Violet, Green and Re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크림슨은 중세에 붉은 선인장꽃을 먹는 코치닐(연지벌레)을 말려 만들었다. 한 번도 교미하지 않은 암컷 코치닐 16만 마리에서 염료 1kg을 얻는 최상품은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현재는 합성염료를 많이 사용한다.

자줏빛 크림슨은 학교의 상징색으로 많이 사용한다. 고려대학교는 1955년 개교 50주년 행사에 크림슨을 교색(校色)으로 지정하면서 크림슨 컬러가 활기와 정열을 상징하여 학풍과 기질을 나타낸다라고 밝혔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 서강대학교, 세종대학교 등의 교색이며 하버드대학교의 대표 컬러이다. 하버드대 교내신문 이름이 <The Crimson>이고, 앨라배마대학교, 미시시피 대학교 등의 상징색이기도 하다.

 

Harvard-University-color code
Harvard-University-color code

 

고급스러운 아우라를 뿜는 크림슨은 자동차나 오토바이 외장색으로도 사랑받는다. 2021년 우리나라 중형 SUV 차량인 현대 자동차 투싼에서 크림슨 레드 펄 색상을 출시하였다. 루비처럼 반짝이는 보석 같은 컬러로 시장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은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자 남자들의 로망인 오토바이 브랜드다. 2021년 미드나잇 크림슨(midnight crimson) 컬러가 출시되었다.

 

2021년형 모델. 할리데이비슨 로드킹
2021년형 모델. 할리데이비슨 로드킹

 

자주색 푸드는 건강 트랜드로 인기가 높다. 자주색 천연 색소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안토시아닌은 항산화 작용으로 젊음을 지켜주고, 혈전을 방지하며 뇌졸중과 고혈압 예방에 도움을 준다. 크림슨 포도, 자색 옥수수, 자색 비트, 자색 고구마 등 자색 푸드를 꾸준히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포도로 건강을 기적적으로 회복한 필자의 친구가 있다. 초기 간경화로 나날이 파리해지던 친구는 매일 포도를 상자째 먹었다고 했다. 병원치료와 식이요법을 통해 간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와 건강해졌고 지금은 강화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크림슨 포도
크림슨 포도

 

스티브 잡스는 심플한 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한 색채로 표현한 로스코에게 영감을 받아 단순한 아름다움을 애플 제품의 디자인에 구현했다. 크림슨 색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열정과 용기가 있고, 감각이 뛰어나며 실행력이 있다. 감성도 풍부해서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은 편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세련된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고집스러우며 비타협적인 성향이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법률가의 꿈이 좌절되었으나 미국 현대미술의 자부심이 된 마크 로스코. 스티브 잡스가 사랑했던 그의 그림을 한 장이라도 가까이에 두고 자주 보자. 용기와 열정과 지성의 상징 크림슨 컬러가 새로운 영감을 줄 것이다. 2022년 새해를 맞아 독자들의 마음에 자줏빛 가득한 희망이 싹트길 바란다.

 

| 김애란 조합원(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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