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햇귀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 이른 산책길, 밤사이 내린 도둑눈이 다른 세상을 펼쳐놓았다. 잔설을 옅게 두른 풀잎이 차가운 공기에 오들오들 떨면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건강한 자연생태계는 야생동물과 물에 사는 동식물은 물론, 여러 곤충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무차별하게 베어내고 파헤쳐 파괴하는 것은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행위다. 도심 속 생태하천인 베르네천의 겨울은 삭막하고 적막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천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평소 폭이 좁은 산책로는 스치듯 걸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서로를 신경 쓰며 다녔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 눈에 띄게 줄었다. 주로 아침저녁에 많았던 산책객이 따스한 온기 따라 한낮에야 제법 모습을 드러냈다. 수런거리던 생명의 힘찬 소리가 잦아들고 냇물도 다소곳했다. 계절을 건너온 베르네천은 쓸쓸했고, 옅은 물안개만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도둑눈이 베르네천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도둑눈이 베르네천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해 10월 초, 천변 양쪽 너른 경사면에 자라던 개망초와 강아지풀이 벌초하듯 깎여나갔다. 강아지풀의 씨앗도 뽀얀 뜨물을 가득 머금었다가 채 영글지도 못하고 한순간에 베어지고 말았다. 풀씨를 베어버려 먹이가 사라지고 몸 숨길 곳이 없어지자 참새와 오목눈이가 이사했다. 까치와 작은 텃새들도 먹이 찾아 작동산과 까치울로 떠나갔다. 앙증맞고 깔밋한 박새의 아름다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낙우송을 옮겨 다니며 꼬리를 탁탁 털던 딱새와 요란하게 지저귀던 찌르레기와 개개비도 자취를 감췄다. 내리꽂듯 나는 곤줄박이와 날쌘 직박구리도 먹이 찾아 떠나갔다. 비둘기 몇 마리가 찾아와 햇볕을 쬐며 깃털을 고를 뿐, 새들이 떠나간 베르네천은 적막했다.

 

강아지풀의 씨앗이 영글었는데 무참히 베어지는 모습
강아지풀의 씨앗이 영글었는데 무참히 베어지는 모습

 

겨울에는 사람은 물론 동물도 추위를 피하며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빈 들판처럼 황량한 천변 위로 겨울바람이 기세등등하게 지나갔다. 이파리를 모두 벗고 마른 가지 흔드는 나목의 초라한 모습. 몸 숨길 작은 은신처인 풀 섶까지 깡그리 베어버린 천변은 작은 새들마저 자취를 감춰버려 스산하고 쓸쓸했다. 추위 피해 먼 길을 날아온 야생오리들이 먹이를 구하느라 연신 물속으로 넓적부리를 들이댔다. 인간의 몰지각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무자비하게 파괴한 베르네천은 먹이를 찾고 몸을 숨기면서 살아가는 작은 동물에는 혹독한 고통과 수난의 서식지로 변했다.

 

 

11, 굴착기가 큰 삽으로 하천 바닥을 파헤쳐 명개흙을 퍼내더니 덤프트럭으로 실어 갔다. 무성했던 노랑꽃창포와 갈대와 부들과 고마리의 뿌리까지 통째로 긁어내는 준설 작업은 새들에게는 만행이다. 먹이와 은신처가 없다면, 새들이 더는 찾아오지 않는 삭막한 하천과 산책로가 되고 말 것이다. 영문 모르는 물오리들이 넓적부리로 하천 바닥에 뿌리내렸던 수생식물의 흔적을 쪼듯 훑고 있었다. 여름이면 복원되리라 생각했을까. 파헤쳐진 저곳에 또다시 싹을 내밀고 무성하게 자랄 수 있을까.

 

새들조차 떠나버린 베르네천의 삭막한 겨울
새들조차 떠나버린 베르네천의 삭막한 겨울

 

베르네천에 흰뺨검둥오리 10여 마리가 텃새로 살고 있다. 물 흐르는 하천은 겨울 철새들이 찾아와서 쉬는 보금자리다. 12월 중순, 무려 60여 마리가 넘어 보이는 새 식구들이 찾아왔다. 눈이 가득 쌓인 추운 지방에서 눈밭을 헤치고 먹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녀석들은 하천을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았다. 군데군데 모여 먹이활동을 하거나 이동하면서 지친 날개를 쉬고 있었다. 이곳에서 텃새로 살던 녀석들은 사람이 지나가도 모른 척하고 경계심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새로 이사 온 녀석들이었을 것이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화들짝 놀란 듯 푸드덕 날아오르기를 반복했다. 낯선 환경에 대해 알지 못하는 위험과 두려움을 경계한 것 같았다.

 

야생오리들이 먹이를 찾는 모습
야생오리들이 먹이를 찾는 모습

 

저녁 6시경이면 까치울역에 내려 베르네천변을 걸어서 퇴근한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몰려드는 하천에 야생오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 정답게 모여 있었다. 도심이지만, 야생동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었다. 하루는 저녁 8시쯤 베르네천 산책길을 지나는데, 드문드문 산책객들이 천변을 걷고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흰뺨검둥오리 몇 마리가 산책로 위로 올라왔다가 갈 곳을 몰라 당황한 듯 경고음을 냈다. 산책객이 머뭇거리다가 오리들이 하천으로 내려간 뒤에야 지나갔다. 밤이 되어도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없었다. 준설작업을 하면서 수생식물이 사는 바닥을 모두 파내고 주변의 풀까지 모두 베어버려 밤이 되어도 몸을 숨길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베르네천은 그야말로 야생동물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힘들고 척박한 곳이었다. 부족한 먹이와 몸 숨길 곳은 물론, 잠잘 수 있는 풀 섶조차 없었다. 생태하천이라는 말은 헛된 구호일 뿐. 야생동물들이 더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파헤치고 베어내며, 살던 동물조차 쫓아내는 만행이었다. 이름조차 부끄럽고 허울뿐인 생태하천이었다.

 

노랑꽃창포와 갈대와 고마리 풀이 무성하던 곳을 파헤친 곳에 흰뺨검둥오리가 넓적부리로 뿌리를 뜯어 식사하는 모습
노랑꽃창포와 갈대와 고마리 풀이 무성하던 곳을 파헤친 곳에 흰뺨검둥오리가 넓적부리로 뿌리를 뜯어 식사하는 모습

 

새들이 떠나버려 지저귀지 않는 천변은 적적했다. 베르네천에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왜가리가 살고 있다. 멸종 위기 등급의 관심 대상으로 알려진 여름 철새지만 텃새가 되었다. 최근엔 보기 힘들던 중백로도 찾아왔다. 부족한 먹이를 찾아 날아온 것 같았다.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아침 식사를 위해 긴 다리를 겅중거리며 두리번거렸다. 물속으로 연신 노랑 부리를 들락거리며 먹잇감을 찾았다. 그나마 왜가리와 백로가 베르네천이 살아있는 생태계라는 것을 알려주듯 물고기를 사냥하고 있었다.

 

왜가리와 중백로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다.
왜가리와 중백로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다.

 

겨울이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철새들에게 먹이 주는 행사가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야생동물도 우리처럼 귀중한 생명을 지녔다. 굶주린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베르네천을 찾아온 귀한 손님을 대접해주는 것은 마땅하다. 작은 섬을 만들고, 하천의 개활지에 새들이 편하게 쉴만한 안식처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먹이가 있고 쉼터와 잠잘 수 있는 안전한 둥지가 있다면, 더 많은 야생동물이 찾아와 터를 잡고 살면서 시민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머지않은 해토머리에 겨울잠 자는 동물과 곤충과 나무도 깨어날 것이다. 추위에 잔뜩 웅크린 새들이 예쁜 부리로 차가운 공기 대신 풀씨를 쪼는 귀여운 모습이 보고 싶다. 베르네천이 살아 숨 쉬는 생태하천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 김태헌 조합원(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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