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3

부천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생각하면 많은 시민분들이 중동의 안중근공원을 생각합니다. 안중근공원에서는 부천시의 공식적인 삼일절 행사와 안중근 의사의 추념식이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 사태 전에는 안중근 의사와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화예술공연이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안중근 의사의 의거(1026)를 기념하여 항일 독립운동 노래를 중심으로 <안중근음악회>를 진행했었습니다.

 

 

부천의 항일 독립운동 중심지는 부천역 남부지역

하지만 이와 더불어 부천역 남부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부천의 항일운동 중심지는 지금의 부천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이었습니다. 현재는 도시개발로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 역사적 사실을 경기도 항일유적 안내판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부천역은 그 당시 소사역이었는데, 소사역은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으로 철도국 경성 운수사무소 관할이었으며 소사역 앞은 부평 수리조합, 소사소학교, 일본 신사 등이 위치해있던 일본인들의 중심 지역이었습니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원활하게 하고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경인선을 이용하였으며, 부평평야에서 생산되는 쌀과 복숭아를 경인선을 통하여 일본 본토와 만주로 보냈습니다. 일제의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었고 물류를 기반으로 하여 경제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져 그 당시 부천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부천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을 분류하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병 활동 : 의병의 오정면 습격(1907)

3.1운동 : 계남면사무소 습격 사건, 소사리 독립 만세운동(1919)

노동운동 : 소사역 하역 노동자 동맹파업(1927)

농민운동 : 부평 농민조합 창립과 부평 수리조합 반대운동(1927)

 

안중근 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안중근 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안중근 의사 의거 기념 부조
안중근 의사 의거 기념 부조

 

첫 번째, 의병 활동

백암 박은식 선생께서는 『韓國獨立運動之血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습니다. “義兵者 民兵也 國家有急 直以義起 不待朝令之徵發 而從軍敵愾者也”(의병은 민병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곧바로 의롭게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군이 되어 적을 무찌르는 것이니라)

한말 의병은 크게 1차와 2차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차 을미의병(乙未義兵)18951896년에 창의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났습니다. 2차 을사의병(乙巳義兵)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빼앗기게 됨으로써 일어났으며,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어났습니다.

우리 부천에서는 1907년 의병 활동이 있었는데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19071029일에는 의병 수십 명이 부평군 오정면을 습격하여 군수금 20원을 징발하고 안산 쪽으로 사라졌다. (황성신문16, 19071119, 「地方消息一通」, 2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계남면사무소 습격 사건과 소사리 독립 만세운동

계남면사무소 습격 사건은 1919324일 부천군 계남면에서 군중들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인 운동으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부수고 민적부, 과세 호수 대장, 주세 수시수입 수납부, 연초 판매수납부, 묘지 사용료 원부철, 역둔토 신고철 등 수탈의 목적으로 사용된 각종 서류를 소각하였습니다. 201812월 경기도에서 계남면사무소 위치에 계남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라는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경기·부천향토문화연구소 양경직 연구위원은 1919324계남면사무소 습격 의거가 발생한 장소는 심곡리 549번지가 아니라 심곡리 538번지(현재 551­9번지 일대)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소사리 독립 만세운동은 계남면 소사리(素砂里) 부근 여섯 개 마을 사람들이 높은 곳에 모여 봉홧불/화톳불(篝火)을 피워 놓고,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부른 운동입니다. 밤에 크게 독립만세를 외치자 소사 주제(素砂駐在) 순사(巡査)가 올라와 곧바로 해산(解散)시켰습니다.

여기에서 높은 곳은 어디일까요? 제 생각에는 심곡도서관 뒤편 산이 소사리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부천에서 일어난 324일 만세운동의 이해는 부천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모두 부천군에 속해있는 지역으로 323일 문학면 관교리, 324일 계양면 장기리 장터(300여 명 참여), 328일 용유면(150여 명 참여), 41일 남동면 질천장터 만세 운동계획 미수사건, 41일 대부면 영전리, 49일 부천군 덕적면 명덕학교, 서당 등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인천과 부천을 지나 인천 남부 그리고 서해안 섬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소사역(부천역) 하역 노동자 동맹파업

소사역(부천역) 하역 노동자 동맹파업은 1927926일 소사역(지금의 부천역) 하역 노동자들이 일으킨 동맹파업입니다. 1927924일 일본인 소사역장이 사소한 일로 하역 노동자를 구타하자 함께 일하는 하역 노동자들이 역장의 징계를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단행한 사건입니다.

 

네 번째, 부평농민조합’(심곡본동 651번지) 창립과 부평수리조합(심곡본동 663) 반대운동

부평수리조합(부천시 심곡본동 663, 청과물시장, 옛 깡시장)1923413일 일제의 제1기 산미증식계획기에 설립되었으며 부평수리조합은 부천군 계남면·부내면·오정면·계양면, 김포군의 양서면·고촌면 내 35()에 걸치는 지역의 수리(水利)를 담당하였습니다. 한강 하류의 물을 양수기로 끌어올려 농업용수를 공급하고자 하였는데, 창립 초기부터 당시 김포·부평 지역에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인 한다[半田善四郞]와 마츠야마[松山常次郞]는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에 값싼 미곡을 제공하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무리한 계획으로, 조선 농민은 수세·소작료·조합비 등을 부담하게 되어 농민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였습니다.
19271028일 부평수리조합지구 내 4,000여 호의 소작인들이 부평수리조합에 대항하여 농민조합’(심곡본동 651번지)을 창립하여 단체행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작인들은 계남면 소사리에서 부평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부평농민조합의 창립은 경기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소작인들의 저항운동으로 농민들은 단결해 소작료 인하 요구를 관철시켰습니다.

앞으로 부천시 차원에서 이 지역을 항일 독립운동 답사코스 또는 부천의 항일 독립운동 역사 이야기가 있는 거리로 만들어 잊혀져 가는 부천의 역사를 되살리는 사업을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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