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 심리’ 13

강렬하고 뜨거운 8월의 태양만을 바라보는 꽃이 있다. 일년초인 해바라기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종일 해를 쫓는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네덜란드의 화가다. 그는 불꽃 같은 정열로 10년간 습작을 포함하여 2,500여 점의 작품을 신들린 듯 그려냈다. 해바라기를 소재로 11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노란색인 크롬 옐로(chrome yellow)를 사용했다.

반 고흐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목회자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벨기에의 탄광촌 교회 임시전도사로 일하면서 성도들과 마찰이 잦았고 1년 만에 전도사직에서 쫓겨났다. 파리에서 화상(畫商)으로 일하던 동생 테오가 상심한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권유했다. 반 고흐는 테오 집에 얹혀살며 화실을 다니고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폴 고갱을 알게 되었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73x91cm, 1888, 반 고흐미술관, 네덜란드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73x91cm, 1888, 반 고흐미술관, 네덜란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남미의 페루에서 자랐고 선원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다가 프랑스의 증권거래소에서 딜러로 근무했다. 부유한 아내와 결혼하여 상류사회의 삶을 누리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재능이 뛰어나 화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폴 고갱은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직장과 가정을 잃고 35세에 전업 화가로 활동하였다.

화가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꿈꾸었던 반 고흐는 남프랑스의 시골 마을인 아를(Arles)’로 떠났다. 시골뜨기였던 반 고흐는 세련된 엘리트인 폴 고갱을 우상처럼 동경했다. 테오는 반 고흐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폴 고갱과 은밀한 거래를 했다. 아를에서 살면 생활비를 주고 작품 판매도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생활고에 허덕이던 폴 고갱은 이 제안에 솔깃했다. 테오에게 폴 고갱이 아를에 온다는 편지를 받고 반 고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매일 해만 뜨면 노랗게 물든 해바라기 들판으로 달려갔다. 환영하는 의미로 해바라기 그림 4점을 그려서 그가 지낼 방을 장식했다. 18888월 폴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다. 그는 노란 해바라기 작품이 있는 방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달랐다. 예민하고 집착이 강한 반 고흐와 고집 세고 독설가인 폴 고갱은 늘 부딪치다가 막장드라마처럼 최악으로 치달았다. 폴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의 눈동자를 정신병자처럼 흐리멍덩하게 표현했다. 조롱당했다고 격분한 반 고흐는 술잔을 집어 던지고 면도칼을 들이밀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폴 고갱은 달아났다. 발작이 일어난 반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잘라 손수건에 싸서 매춘부에게 건네주며 폴 고갱에게 전해달라고 했으나, 물건을 펼쳐 보고 혼비백산하여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188812, 동거 60일 만에 폴 고갱은 테오에게 급하게 전보를 치고 파리로 돌아갔다.

반 고흐는 아를의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발작과 환청에 시달리지 않을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한 달쯤 후에 폴 고갱은 편지를 보내서 급하게 떠났던 것을 사과하며 멋진 해바라기작품을 두 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반 고흐는 아를에서 머무르던 70여 일 동안 크롬 옐로로 두텁게 색칠한 해바라기. 밤의 카페. 별이 빛나는 밤에등 무려 75점의 명작을 쏟아냈다. 18907월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장례식에는 해바라기 한 다발과 노란색 꽃이 가득했다고 한다. 테오 마저 다음 해 사망하자, 반 고흐가 남긴 모든 작품은 테오의 부인인 요안나가 물려받았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화, 95x73cm, 1889, 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화, 95x73cm, 1889, 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

 

수년 전, 필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방문했다. 그림을 배우던 초기에 그린 갈색톤의 작품이 많았다. 낡아 너덜너덜해진 군화를 그린 작품 신발과 갈색으로 변한 작품 해바라기에 진한 감명을 받았다. 외톨박이로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 버림받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반 고흐의 처절했던 고통이 녹아있는 작품을 보면서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미술관에는 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관람자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위대한 명화는 사람의 마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반 고흐 미술관이 소장한 1889년 작품 해바라기를 집중 관찰했다. 크롬 옐로와 황산염 성분의 하얀 물감을 섞어서 붓으로 칠한 노란색 꽃잎과 줄기 부분이 점점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했다. 프랑스 화학자가 광물 홍연석에서 크롬 옐로를 발견했는데, ‘빛깔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롬(chroma)’으로 명명했다. 크롬 옐로는 납 성분이 있어서 황산염과 섞이거나 햇빛에 노출되면 갈색으로 변하는 성질이 있다. 반 고흐와 당시 화가들은 20세기 초에 대량 생산된 값싸고 선명한 크롬 옐로 물감에 열광하였다.

일본 도쿄에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한 점이 있다. 1985년부터 일본 경제의 버블현상으로 주식과 부동산의 자산 가치가 거품처럼 부풀었다. 일본은 막강한 재력을 앞세워 세계적인 명화를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19873, 런던 크리스티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일본의 야스다 보험회사가 작품 해바라기를 낙찰받았다. 당시 최고 경매가인 4천만 달러였고 현재 가치로는 1천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후에 그의 회사는 부도가 나서 작품과 함께 손보 재팬보험회사로 인수 합병되었다. 현재 도쿄의 손보미술관(損保美術館)’에서 해바라기를 상설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위작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15송이의 해바라기를 그린 작품이 두 점 있다고 했다(현재, 영국 내셔널갤러리와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서 한 점씩 소장). 편지에는 일본이 소장한 작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요안나의 반 고흐 작품 목록에도 없다고 한다. ‘아메데 슈페네커라는 화상이 이 작품을 판매했는데, 그의 형이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해바라기를 보수 작업하면서 위작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일본이 소장한 작품은 당시 사용했던 물감과 달라서 변색하지 않았으며 화가의 서명조차 없다고 한다. 잡음이 끊이지 않자, 2002반 고흐 미술관측이 진품이라고 밝혔지만, 여전히 진위가 불투명하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화, 92.1x73cm, 1888, 내셔널갤러리, 영국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화, 92.1x73cm, 1888, 내셔널갤러리, 영국

 

눈에 확 띄는 노란색은 브랜드의 로고를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노란색 배경에 말풍선 로고를 보면 모바일 소통망인 카카오톡이 떠오른다. 카카오의 노란색은 자신감과 긍정을 의미하며 즐겁고 젊은 이미지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 카카오톡 점유율은 무려 전 국민의 94.4%. 20223월 미국의 경제 전문지인 포브스는 우리나라의 부자 1순위로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회장을 손꼽았다.

츄파춥스는 막대사탕의 대명사다. 크롬 옐로 바탕에 빨간 글씨의 로고가 돋보인다. 츄파춥스는 핥다라는 스페인어 츄파르(chupar)’에서 유래했다. 1969년 스페인 기업인 베르나트 사장은 친구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경영난과 로고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달리는 즉석에서 냅킨 위에 로고를 스케치해서 주었다. ‘희망이라는 꽃말을 가진 노란 데이지꽃에서 영감을 얻은 로고는 츄파춥스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전 세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따뜻한 색감의 크롬 옐로는 행복과 희망을 주는 색채다.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집중력을 주는 효과가 있다. 반 고흐는 사모했던 폴 고갱과 함께하는 행복에 푹 빠져서 해바라기를 그렸다. 독자들도 해바라기 색깔인 크롬 옐로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듬뿍 받아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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