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분분히 날리는 벚꽃이 지면 연둣빛 새싹이 우우우 피어날 것이다.
분분히 날리는 벚꽃이 지면 연둣빛 새싹이 우우우 피어날 것이다.

 

기어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꿈꾸듯 황홀한 연초록이 새뜻하다. 꽃 몸살을 앓다가 겨우 벗어났는데, 눈부신 신록이 치명적인 꼬드김으로 찾아왔다. 가지마다 일렁이는 연둣빛의 오묘함에 홀리듯 빠져든다. 가만한 바람에도 혼절하듯 날리는 벚꽃과 짧은 만남이 아쉽지만, 자연의 섭리 앞에 모두 겸손하다. 노곤한 봄이 무르녹고 있다. 꽃잎이 스러진 초췌한 자리마다 말쑥하게 얼굴 내민 오월의 신록이 눈부시다.

벚꽃이 분분하게 흩날리는 베르네천의 천변을 걸었다. 봄에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을 놓치기 전에 아쉬움을 달래보려는 심산이다. 화려했던 순간을 뒤로하고 꽃잎이 하염없이 떠나며, 대지 위에 연분홍 아쉬움의 흔적만 남겨 놓았다. 한마디 하소연도 남기지 않고 우르르 떠나보내는 애잔한 심정을 헤아려 본다. 꽃잎 몇 장이 펄럭이더니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뒤를 따라가며 소멸해 가는 아쉬움을 토해낸다. 잠시나마 황홀하게 세상을 밝히고 소리 없이 스러지는 꽃의 허무함을 볼 때면, 미지근한 바람조차 미워진다. 환장할만한 아름다움은 늘 짧아서 오래도록 아쉬움을 남긴다.

꽃이 피어야만 완연한 봄이라고 한다. 한겨울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한순간 툭 터트렸다 소리 없이 스러지는 것이 꽃의 운명이다. 달뜨고 설레던 황홀감이 사라지는 날에는 새들도 서운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던 밤, 세상을 등진 동생과 속절없이 지는 벚꽃을 바라보던 일이 두고두고 마음 아프다. 아른거릴 추억조차도 남기지 못했는데, 벚꽃엔딩을 들어야 했다. 아득한 그리움만 남기고 속절없이 져버린 꽃잎을 보고 흐느껴 울던 기억이 아프다. 그런 날은 삶이 허무를 넘어 아프게 다가왔다. 속상하고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산책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물속에 반영된 능수버들 가지에도 신록이 가득하다.
물속에 반영된 능수버들 가지에도 신록이 가득하다.

 

잎새달을 보내고 오월을 맞았다. 신록이 펼쳐놓은 그림으로 들어가면 이파리마다 발랄하게 수런거린다. 눈 돌리는 곳마다 연둣빛이 손짓하며 물결치고,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색감과 채도가 아득하다. 키 재는 새싹 틈으로 가녀린 꽃들의 넋이 살포시 스며들고, 벚꽃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혔다. 버찌가 익으면 새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신록이 유혹하는 눈 흘김에 마음조차 움찔한다. 산자락에 점점이 박혀있는 산벚꽃이 숨죽이듯 빛난다. 막 피어난 애기똥풀도 말갛게 웃고 있다.

직박구리가 벚꽃에서 꿀을 따다가 고개를 길게 뽑아 하늘 향해 목청을 높인다. 필시, 암컷을 부르는 노래일 테다. 구슬을 굴리듯 티끌 없이 맑은 노래에 공기마저 들썩인다. 중저음의 바리톤보다 높고 화려하다. 옥타브를 넘나드는 테너쯤 될까. 매력적인 노래의 꼬드김에 날아온 암컷이 시치미 떼고 꽃잎을 쪼아댄다. 꽁무니를 빼고 나는 척하더니 건너 가지에 살포시 앉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조차 리드미컬한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가 되어 퍼르퍼르 흩날리며 지상으로 내려온다.

신록이 산자락 곳곳에 연한 수채화 물감을 몽글몽글 뿌려놓았다. 이즈음엔 사방으로 번져가는 새순의 발랄함이 화려하다. 멀리서 보면 모두 같은 색을 품은 나무로 보이지만, 비슷한 듯 옅고, 짙은 듯 찬란한 연둣빛이 흐른다. 여리고 순한 것들이 빚어내는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다. 산자락마다 차오르는 신록의 자태는 황홀함, 그 자체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늑하고 포근하여 감탄조차 잊게 한다. 다양한 채도와 명도로 잘 직조된 신록은 여느 계절보다 화사하게 눈부신 풍경을 빚어낸다.

 

베르네천을 아름답게 물들인 복사꽃이 그림같다.
베르네천을 아름답게 물들인 복사꽃이 그림같다.

 

꽃향기에 취해 걷다가 나른한 봄 햇살을 즐긴다. 쉬엄쉬엄 산자락을 따라 걸으면, 진분홍 복사꽃이 반긴다. 회백색 가지 위에 화관을 얹어놓은 듯 꽃마다 발그레하다. 제철 만난 꽃과 꿀벌이 서로를 반기며 희롱한다. 화사한 빛깔과 은은한 향기가 마음속으로 살포시 젖어 들고, 매혹적인 빛깔과 향기도 점점 짙어간다. 귀밑머리 간질이던 명주바람이 복사꽃 꽃잎을 흩날릴 때면, 풋 가슴도 덩달아 까닭 없이 달뜬다. 여염집 마당에 복숭아나무를 심지 말라 했던 선조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느긋하다. 신록으로 치장한 잎이 날로 푸르러져 풍성함이 그득하다. 능수버들도 가지마다 연둣빛 치마를 둘러 입었다. 수면에 드리운 그림자도 바람의 결을 따라가며 넘실넘실 출렁인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자늑자늑 춤을 추면 물속 그림자도 장단을 맞춘다. 잔잔한 물 주름조차 숨죽인 수면 위로 오월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연둣빛이 그린 수채화가 바람 한 점도 부르지 않고 눈부시다.

오월은 온 누리에 생명이 나부낀다. 저마다 호흡을 가다듬고 존재감을 드러내며 싱그러운 녹음으로 치닫는다. 피천득 선생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양하 선생은 연둣빛 광채를 내는 신록의 절정을 노래한신록 예찬은 시대를 건너 독자들의 마음을 훔쳤고, 노천명의 푸른 오월과 김영랑의 오월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의 여왕을 노래했다. 희망으로 생명을 키우는 달이다. 꽃 빛은 야위고 초록이 살찌는 오월은 맑은 공기와 부드러운 햇살과 해사한 꽃들의 세상이다.

 

베르네천 산책로를 아름답게 꾸민 조팝나무꽃
베르네천 산책로를 아름답게 꾸민 조팝나무꽃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득 넘치는 가정의 달이지만, 압박감이 큰 달이기도 하다. 일 년 중 가장 부담스러운 달도 오월이라고 한다. 행사도 많고 주위를 살피며, 여러모로 지출도 많은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가정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이 연이어 있다. 상대적 박탈감도 커서 허리가 휠 정도로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많다. 힘들 때일수록 자연이 그려낸 수채화 속으로 풍덩 빠져 신록을 바라보고 즐겼으면 좋겠다. 마음속에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활기를 줄 것이다. 녹음이 향연을 펼치고, 싱그러운 바람이 몸과 마음에 청량제를 선물할 것이다.

신록으로 물든 산 내음과 싱그러운 바람이 몸을 휘감으면, 우리도 시나브로 자연 속에 풍경이 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자연과 가까울수록 병은 멀어지고, 자연과 멀어질수록 병과 가까워진다.”라고 했다. 숲을 지나온 바람에도 연초록 향기가 스며있는 오월. 신록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함으로 다가와 마음의 병까지 고칠 것이다.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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