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오월에는 하얀색 꽃이 유독 많이 핀다. 신록이 빛나고 수풀이 무성해지면서 흰 꽃이 눈에 잘 띈다. 초록에 묻히지 않고 가루받이를 도와주는 곤충의 눈에 잘 띄어, 불러 모으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슬기로움은 늘 경이롭다. 찔레와 아까시나무의 달큼한 꽃향기가 솔솔 풍기는 요즘.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꽃이 마음을 훔친다. 태양숭배 사상이 강한 우리 민족은 밝은 빛을 상징하는 흰색을 신성시했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처럼 명절은 물론, 제사 때도 흰옷을 입고 흰떡과 흰밥을 즐겼다.

 

활짝 핀 이팝나무 꽃잎 하나하나가 영락없이 쌀로 지은 밥알 모양이다.
활짝 핀 이팝나무 꽃잎 하나하나가 영락없이 쌀로 지은 밥알 모양이다.

 

반세기 전, 오뉴월은 배고픈 춘궁기보릿고개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으로 자급자족이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1960년대 연이었던 극심한 가뭄은 더욱 굶주리게 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속껍질인 송기를 먹고, 찔레꽃 피기 전 부드러운 순을 따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운 색깔의 박태기나무꽃과 소박한 아름다움의 조팝꽃, 풍성하게 부푼 이팝꽃을 보고 허기를 달랬을 것이다. 꽃은 머지않아 햇곡식이 익으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시기를 알려주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밥풀 모양의 꽃을 볼 때마다 허기졌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흰 이팝나무꽃이 신록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베르네천의 모습
흰 이팝나무꽃이 신록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베르네천의 모습

 

사월에 피는 박태기나무의 진분홍색 꽃도 밥풀 모양을 닮았다. 잎도 나지 않는 가지에 다닥다닥 꽃송이를 달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고 예쁘다. 나무의 아랫부분에서 맨 위까지 곱게 물들인 밥알을 붙여놓은 꽃기둥처럼 보인다. 꽃빛이 고운 데다가 많은 꽃이 온통 가지를 감싸 안은 것처럼 피어 마음을 훔친다. 밥알의 전라도 방언인 밥테기에서 비롯되어 박태기로 부른다고 한다. 쌀을 튀긴 모습과 같아 밥 튀기에서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나무줄기에 붙은 꽃송이가 찹쌀에 팥을 넣어 지은 찰밥 같다. 배고픈 시절, 밥알을 닮은 꽃을 보면, 더한 허기를 느꼈을 것이다.

 

붉은 팥을 넣어 지은 찰밥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운 박태기나무꽃
붉은 팥을 넣어 지은 찰밥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운 박태기나무꽃

 

조팝나무꽃은 조밥 닮은 흔하디흔한 꽃이다. 앙증맞고 화려하지 않고 소담하며 순박하다. 단아한 꽃 모양이 좁쌀을 튀긴 것 같아 좁쌀밥나무 즉 조팝나무라고 부른다. 조를 튀겨놓은 듯해 조밥나무라고도 불렀는데, 강하게 발음하다 보니 조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꽃을 보면 좁쌀로 지은 밥처럼 까슬까슬한 식감이 느껴질 것 같다. 조밥은 목구멍으로 쉬 넘어가지 않는 푸석푸석한 맛이다. 풀 섶 마른 가지에 시무룩하게 핀 하얀 조팝꽃이 다닥다닥 붙어 배고팠던 어린 동심을 어루만져 주었다.

청보리가 익어 보리누름이 들판을 덮기 전, 채 익지 않은 풋보리를 베어 바심할 때까지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잘 먹지 못한 아이들의 퍼석퍼석한 볼에 마른버짐이 피어 번질 때 조팝꽃이 흐벅지게 피었다. 몽실몽실한 작은 꽃망울이 빼빼 마른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꽃띠를 이루며 흐드러지게 핀다. 꽃가지가 휘휘 뻗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은 눈을 떼지 못하게 붙잡는 매력이 있다. 여느 꽃 못지않게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꽃이다.

조팝나무꽃은 봄날의 산과 들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키가 작고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떨기나무로 희고 곱다랗게 꽃이 피면 여러 개의 꽃 기둥을 세운 모습이 발랄하고 환하다. 메마른 가지에 작은 꽃이 주저리주저리 흐드러지게 피어, 무리 지어 놀고 있는 아기 구름처럼 보인다. 치렁치렁 삼단 같은 머리카락에 눈꽃처럼 피어난 조팝나무꽃은 다른 나라에서도 사랑받는다. 일본에서는 버들잎 모양의 잎이 꽃과 같이 피는 모습을 보고 눈 버들이라는 뜻의 설유(雪柳)’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다.

 

작은 꽃망울이 빼빼 마른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꽃띠를 이룬 조팝나무꽃
작은 꽃망울이 빼빼 마른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꽃띠를 이룬 조팝나무꽃

 

베르네천 천변에 피어난 꼬리조팝나무의 하얀 꽃이 시민의 눈길을 잡는다. 조팝나무의 솔솔 풍기는 향기에 취하여 꽃 빛 따라 걷다 보면 꽃과 신록이 숨바꼭질한다. 사진을 찍거나 코를 가까이 가져다 큼큼거리며 계절의 향기를 맡는다. 길게 늘어진 가지는 잘 휘어져 동그랗게 이으면 화관이 된다. 조팝나무로 화관을 만들어 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의 머리에 얹어주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은밀한 사랑’, ‘매력이라는 꽃말과도 잘 어울리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하얀 꽃이 피어 있는 이팝나무를 보면 막 지은 쌀밥처럼 보인다. 윤기가 잘잘 흐르고 고슬고슬한 밥에 김이 오르는 착각에 빠진다. 멀리서 보면 함박눈이 소복이 쌓인 듯 눈부시다. 새하얀 작은 꽃 수백 수천 송이가 무리 지어 피어난 곳에 흰 구름이 살짝 내려앉은 듯 환하다.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 전체가 하얀색의 꽃으로 뒤덮여 장관을 보여준다. 가늘게 넷으로 갈라지는 꽃잎 하나하나가 영락없이 뜸이 잘든 밥알처럼 생겼다. ‘이밥이란 말은, 쌀밥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밥이란 어원은 () 씨의 밥에서 유래했다. 이씨 왕조였던 조선시대에는 벼슬해야 비로소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다고 한다. 활짝 핀 꽃잎 하나하나가 영락없이 쌀로 지은 밥알 모양이다. 멀리서 보면 밥그릇에 쌀밥을 수북이 담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 조상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보릿고개에 주린 배를 잡고 바라본 이팝나무꽃은 더더욱 쌀밥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름이 시작될 때인 입하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불렀는데 발음하기 좋게 이팝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베르네천 산책길에 핀 조팝나무꽃
베르네천 산책길에 핀 조팝나무꽃

 

꽃에는 상징과 역사가 담겨있다. 19805월의 광주에도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팝나무꽃은 광주 5, 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꽃으로 ‘5, 18의 꽃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금남로에서 군부독재에 맞선 시민군과 학생들에게 흰 주먹밥을 건넸다. ‘국립 5·18 민주 묘지를 향하는 길에는 40여 년 전 그날의 '주먹밥'을 닮은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희생하신 분들의 원혼과 유족의 아픔을 달랜다. 참배하는 시민들에게 이 땅의 민주화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신록의 오월은 상큼함을 넘어 녹음 짙은 여름으로 채비를 서두른다. 봄이 강물처럼 떠내려갔다. 머지않아 여름을 맞아 산은 더욱 푸른 옷으로 갈아입고 녹색을 찬미할 것이다. 풍요로움이 넘치는 세상에 보릿고개의 애환을 들추는 것은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뜻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굶어보면 배고픔의 설움을 알고, 밥이 하늘이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꽃은 애환을 담고 위안이 되며 희망을 주는 상징이다. 반세기 전, 보릿고개를 슬기롭게 이겨냈던 인내와 지혜를 떠올려 본다. 꽃은 여전히 시대와 장소를 넘어 아련하고 애틋한 희망이다.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