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뼈만 남은 몸에서 광채가 난다. 작은 빛 조각으로 분해되어 허공으로 점점 흩어진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들이 사후 세계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이 화면 가득하다.

<코코>라는 영화를 보며 주황빛 금잔화로 꾸며진 사후 세계가 아름답고 흥미로웠다.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행사를 주제로 만든 만화영화이다. 사후 세계가 2단계로 나뉘어있는데 이승에서 누군가 기억을 해주면 1단계에 머물며 일 년에 한 번씩 죽은 자의 날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러 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으면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2단계의 세계로 간다. 완전한 죽음이란 사라짐을 의미한다. ‘죽은 자의 날은 우리나라 제사와 비슷하지만 엄숙한 우리의 제사와는 달리 일종의 축제이다. 저승에 있는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건너와서 가족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날이므로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해야 한단다. 단 누군가가 죽은 자를 기억하고 제대에 사진이 올려져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소년 미구엘의 집은 4대가 동거하는 신발 장인의 집안이다. 화목한 가정이지만 오직 한가지 금기사항은 음악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조할아버지가 음악 때문에 가족을 버렸다고 생각하여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가족들 몰래 음악가를 꿈꾸는 미구엘은 음악영웅인 전설적인 가수의 기타에 손을 댔다가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뼈만 남은 앙상한 해골들이 사는 저승이 무섭기는커녕 활기차고 신선하다. 그곳에서 2단계로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헥토를 만난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죽이고 음악과 기타를 빼앗은 친구는 음악영웅이 되었고 헥토는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그가 바로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였다.

이승으로 돌아온 미구엘은 아빠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던 증조할머니 토토와 함께 헥토의 노래 기억해줘를 부른다. 토토의 기억이 살아나자 헥토는 선명해졌고 제대에는 사진이 올려졌다. 그 장면에서 내 마음도 뜨거워졌다. 행복이라고 이름 붙일 여러 장면과 그리움이라고 불러낼 여러 얼굴들이 뒤섞여 떠 올랐다.

'기억해줘'라는 말에는 너무나 복잡한 감정과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행복했던 순간을, 누군가는 자기가 빛났던 순간을, 누군가는 자기가 슬펐던 순간을 기억해달라곤 한다. 어쩌면 '기억해줘'라는 한 마디는 추억을 이어주고 그 추억으로 살아가는 삶에 원동력을 주는 말인 것 같다.

 

애니메이션 '코코' 스틸 컷
애니메이션 '코코' 스틸 컷

 

영화 속에서 노환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미구엘의 증조할머니를 보며 같은 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오래된 앨범에서 혹시나 하고 할머니 사진을 찾았으나 한 장도 없었다. 아버지께 할머니 사진을 부탁했다. 겨우 두 장의 사진을 찾았다며 핸드폰으로 보내 주셨다. 한 장은 고궁을 배경으로 앞만 보고 어색하게 서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습이었고 다른 한 장은 내 곁에서 식사 중인 할머니 사진이었다. 오랜만에 본 사진 속 두 분 모습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가신 지 삼십 년이 지났지만, 할머니의 손을 잡았던 부드러움은 손끝에 남아 기억을 자극했다. 오랜 저장창고 속에서 할머니의 사랑으로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나를 보고 웃던 따뜻한 눈빛, 내 얼굴을 쓰다듬던 보드라운 손길, 꼭 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던 깊은 응원과 신뢰 그리고 은밀한 사랑.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따끔거리는 슬픔이었다. 엄마와의 갈등 때문에 할머니를 맘껏 좋아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친한 모습이 엄마에게는 고통이었으므로. 사랑을 느끼면서도 엄마의 눈치를 살펴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결혼으로 곁을 떠난 후 청주와 서울 거리만큼이나 마음도 멀어져갔다. 손자를 키워보니 아들만 다섯을 둔 할머니가 첫 손녀인 나를 흠뻑 사랑했으며 간절히 보고 싶었을 마음이 느껴졌다. 사진 속 할머니 얼굴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마음 깊이 그리움과 후회가 뒤섞여 흐른다.

나는 헤어질 때나 삶을 마감할 때 기억해줘라고 하는 것이 은근히 싫었다.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 고통이 따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떠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무리 눌러도 기어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풍선처럼 내가 잘못한 것들이 떠올라 힘겨웠다. 항상 잘못만 하고 살지는 않았을 텐데 잘한 것은 희미하고 잘못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후회와 마음의 빚만 늘어가니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은 잊고 싶었다.

<코코>를 보는 동안 한입 베어 문 솜사탕이 스르르 녹으며 입 안 가득 달콤함이 퍼지듯 마음속에 천천히 훈훈함이 배어들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반겨주고 사랑하며 곁을 내주었던 가족과 친척들. 살아가는 동안 내 곁으로 한발씩 다가와 주었던 많은 인연들. 그들을 무심하게 두지 말아야지. 세월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전에 모든 추억이 아득해지기 전에 부단히 챙기고 헤아려야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소중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훗날 후회가 나를 덮칠지라도 행복한 추억 하나로 유연하게 버틸 수 있도록.

죽은 후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은 누가 있을까. 누구와도 마음 아프지 않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싶다. 서로의 기억 속에 따뜻하고 환했으면 좋겠다. 함께 웃었던 기억으로 가득하면 더 좋겠다.

 

| 정옥순(2019년 월간한국수필신인상 수상.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솔샘문학회 회원)

 

정옥순 수필가
정옥순 수필가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