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였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그의 저서에서 1차원적 인간을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사상과 행동이 체제 안에 완전히 내재화되고 변혁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현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노동 시간은 줄어들었고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었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경제 여건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며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갈등을 싫어하며, 그저 편하고 자유롭기만을 바랄 뿐이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들은 마다하고, 쉽게 경제적 풍요를 얻고자 희망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싫어하는 사람과는 관계하지 않으려 하며,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뿐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 친척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거나, 성격이나 기타 문제로 그 사람이 자신과 잘 맞지 않고, 왠지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친했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끊고 영원히 이별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존재는 오직 나의 이익만을 위해 있는 것이며,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나의 삶에 있어서 어려움을 주게 만들거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거침없이 그 사람과의 오랜 인연도 끝내버리곤 한다.

만약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이 싫어지거나, 증오를 느끼게 된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해 버리는 쪽을 선택해 버린다. 그것이 오래도록 함께 한 가족일지라도, 나를 낳아주고 키워 준 부모라 할지라도, 별 고민도 없이, 서슴지 않고 선택하여 결정해 버린다.

아무리 싫어하고 증오한다고 하더라고 오랫동안 세월을 같이한 한 사람의 소중함을 왜 그리 쉽게 잊는 것일까? 자신이 좋아한다고 잘해주고, 싫어한다고 외면한다면 그는 1차원적 인간관계만을 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이 비록 끔찍하게 싫어하고 증오하는 대상이라도 마음 한구석의 공간을 열어 품어나가려 노력할 때 1차원적 인간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동안 내가 받았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너무 많이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를 현재 힘들고 어렵게 하는 존재도 한때는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힘이 되어주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쉽게 내치고 무관심하며 아무런 감정도 없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최선일까?

쉽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은 어쩌면 가장 비굴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 선택을 한 경우,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그런 선택을 당할 수도 있다. 조금 힘들고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작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을 생각하고, 판단하며 너무나 쉽게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정태성(한신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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