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0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지사

서울역 광장에 가면 강우규(姜宇奎, 1855 714~ 1920 1129)지사 동상이 있습니다. 강우규 지사는 일제 강점기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1919 92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임명된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신임 총독 사이토를 폭살시키지는 못하였으나 환영을 나온 일제 관헌 및 그 추종자들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습니다. 강우규 지사는 현장에서 몸을 피신하였으며 무려 15일 동안 일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생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917 수감되고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 1129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65세임에도 불구하고 의열 활동을 했으니 독립운동과 광복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우규 지사를 체포한 인물이 바로 부천군수를 지낸 김태석이었습니다. 김태석은 악질 친일 경찰로 고문과 조작을 일삼는 1세대 친일 경찰이었습니다.

 

부천군수는 무조건 친일파, 10명이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1905년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8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를 수록한 인물 총서입니다. 친일반민족행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이에 해당되는 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군수를 지낸 자들은 모두 친일파에 해당이 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부천군수를 지낸 사람들을 살펴보면 총 10명으로 이름과 재임 기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태석은 훈도, 경찰, 중추원 참의 등 고위직을 두루 거친 뼛속까지 일본인에 가까운 친일파입니다. 김태석의 친일 행적을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태석의 친일 행위는 그 직업과 행위를 바꾸면서 나날이 악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태석의 일생과 친일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훈도

김태석은 친일파 박제봉과 같이 처음에는 훈도로 시작합니다. 19084월 평안남도 평양보통학교 본과 훈도로 재직하다 19129월 교직을 떠납니다.

두 번째, 경찰

김태석은 1912년 함경북도 웅기경찰서 통역생을 시작으로 경찰에 투신합니다. 경찰을 하면서 조작과 고문의 친일 경찰의 본색을 드러내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항일·독립운동을 방해합니다.

1915년에 항일 비밀결사 일심사(一心社)사건 관련자를 체포하였으며, 1919년 경성역에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姜宇奎) 지사와 관련자인 허형(許炯최자남(崔子南오태영(吳泰泳) 등을 검거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 의친왕 이강(李堈)의 국외 탈출을 모의한 대동단의 거사 계획을 정탐하여 상부에 보고해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데 관여하였습니다.

이어 19206월 조선총독부와 각 관공서를 파괴하고 총독 사이토와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준비하던 의열단을 수사하여 거사를 무산시켰습니다. 이 밖에 192110월 말 조선독립단원 김희중(金熙重)과 그 연루자인 황정연(黃正淵)을 검거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이처럼 고등경찰로서 악명이 높아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이른바 7가살(七可殺)로 지목되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김태석을 고등 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우리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우리 지사(志士)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醜類)로서 선우갑(鮮于甲김극일(金極一)과 같은 흉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세 번째, 군수

192412월 군수로 전임하여 경기도 가평군수에 임명되었으며 부천에는 19302월에 왔습니다.

네 번째, 함경남도. 경상남도 참여관

19334월 참여관으로 승진해 함경남도 참여관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습니다. 함경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과 관련하여 도청 간부와 부하 직원을 지휘 독려하여 일본군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함경남도 함주군과 정평군 선덕면에 육군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또한 19386월 경상남도 참여관 겸 경상남도 산업부 사무관으로 전임되어 산업부장을 맡았습니다.

다섯 번째, 중추원 참의

19442월 조선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800년의 수당을 받았습니다.

김태석은 해방 이후 단죄받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1948년 친일파 처단을 법제화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되자 일본으로 도주하려다가 1949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습니다. 고등경찰을 지낼 때 애국지사를 체포한 혐의와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지낼 당시 지원병 모병 시험관을 겸무하면서 조선 청년을 출병케 한 혐의가 적용되었습니다.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무기징역과 50만 원 재산몰수형으로 감형 선고를 받았으며, 19506·25전쟁 직전에 석방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 중에는 일제 강점기의 이완용, 송병준과 같은 매국노만 친일파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학원 사성을 지낸 박제봉과 고등계 형사와 부천군수 그리고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태석과 같은 사람들도 친일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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