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오랜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날. 근동(近洞)에서 모이니 화장도 대충 하고 길을 나섰다. 60대 여자들 모임이란 게 밥 먹고 극장을 간다든지, 차 마시며 수다를 떤다든지, 좀 수준을 높이자면 연극을 본다든지 거의 매번 비슷한 수준이다.

일곱 명이 영화를 보고 찻집으로 갔다. 수다의 시간이다. 한 친구가 우리 사돈은 나에게 이러저러하네.’ 하니까 다른 친구가 어디 사람이냐고. 경상도 사람이라니까 경상도 사람은 그러지 않는단다. 덧붙여 경상도도 안동은 그럴 리가 없다고. 안동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은 거개가 자기 집안이 양반이라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모두 양반의 후손이고 싶은 것 같다.

신혼 때부터도 남편은 자기가 남양홍씨 양반이라며 으스댔다. 어느 일간지에 외국인이 한국의 양반 순위를 연구 조사한 내용이 실렸는데, 남양홍씨가 조선에서 4번째로 벼슬을 많이 한 성씨라는 기사를 읽은 뒤로 더욱 어깨에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아니꼽고 얄미웠지만, 남편이니까 그런대로 봐주겠는데, 윗 동서는 동서대로 친정이 양반입네 하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친정이 양반이라고 으스댔다. 시댁에서 양반이 아닌 사람은 나뿐이어서 양반 타령에 배알이 꼬이기도 했다. 양반이라는 말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쓰였던 것 같은데 5천 년 역사에서 하필 그때만을 짚어서 너도나도 양반이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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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해 김씨다. 어른들로부터 굳이 양반이라는 자랑을 못 들어봤으니 조선시대에 조상님들이 높은 벼슬은 못 하셨던 모양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이 충청도라 하면 양반이라 하고 경기도면 깍쟁이겠네라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고정관념이 있다. 누군가가 남편더러 충청도 양반이라 하면 양반 하나에 종이 셋이라고 했던 사람이다. 양반 하나에 종이 셋이면 양반고을에 양반보다 천민이 더 많았다는 셈이라고 했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댁 식구들도 성씨를 가지고 유별나게 상반을 따져 심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큰 딸아이가 세 살 때였다. 큰댁과 담장을 끼고 살아 세 살짜리 큰아이는 혼자서도 큰댁으로 마실을 잘 다녔다. 그날도 혼자서 큰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가 애를 데리고 오시더니 애 교육 좀 시키라고 하셨다. 큰어머니가 애더러 상놈의 자식인가. 큰댁이라 할 줄을 모르고 매번 큰집이라 하느냐고 했단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저 밑에서부터 불덩이 같은 게 치밀어 올랐다. 시어머니도 큰 동서의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아이를 얼른 데리고 나온 심사 같았다. 나는 발끈했다. 큰댁 조카들은 뭐라고 하느냐고. 작은 집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삼촌은 작은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조카들은 아직도 삼촌이라고 하느냐고 따졌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내가 그렇게나 마음 상해할 줄은 몰랐던지 아이에게 가르치면 될 걸 화까지 내느냐며 무안해했다. 어떤 어미가 상놈 타령을 하며 자식을 험구하는 데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댁 식구의 양반 타령은 나에겐 횡포였다. 가끔 남편에게 조상이 양반이었으면 무얼 하나. 지금 하는 짓이 양반다워야지.’라며 조목조목 따져가며 대거리하곤 했다. 남편은 그렇게 따지는 것에는 약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무기로 쓸 수 있는 하나의 큰 방편이기도 했다.

친구들의 수다는 매번 그렇듯이 목소리 크고 고집 센 사람이 주도하는, 결론을 맺을 수 없는 수다로 다음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내내 양반 타령이 귀에 쟁쟁했다. 이 시대에도 살던 동네를 따져서 자기도 양반인 양, 모든 동네 사람이 양반인 양 하는 것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반이 되고 싶으면 언행도 양반의 격을 잃지 않아야 진정한 양반이 아닐까.

남동생이 핸드폰의 형제 단톡방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을 보내왔다. 할아버지 제상에 올려진 흑백사진이다. 오랜만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시골의 안방 벽에 걸려있던 사진들 중에 맨 앞에 있던 사진이 궁금해졌다. 그분의 사진도 아직 간직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여러 번 이사하면서 없어지고 말았단다.

나는 농부의 딸이다. 어려서 살던 시골집 벽에는 가족사진이 죽 걸려있었다. 가족사진이 걸린 맨 앞에는 수염이 길고 갸름하면서도 둥근 얼굴에 왕관을 쓰고 있던 수로왕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수로왕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셨던 것 같다. 오랜만에 본 할아버지의 사진이 천오백 년도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그분을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 들어 눈이 흐려진 탓이라고 하려나. 다음 모임엔 우리는 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큰소리 한번 쳐볼까.

 

| 김해월(한국수필가협회·한국수필작가회 회원)

 

김해월 수필가
김해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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