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1

앞서 총 10명의 부천군수 출신 친일파 중 가장 거물에 해당하는 김태석(金泰錫)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부천군수들은 부천지역에서 어떠한 친일 행적을 했을까요? 부천군수는 적극성과 자발성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지위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며 그 행위로 인한 해악은 생각보다 치명적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정책에 따른 군수들의 친일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토지조사사업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우리나라 토지를 약탈하고, 조세 수입을 증대시키고 일본의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해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합니다. , 국유지와 미간지(未墾地)를 점유하고 지세수입(地稅收入)을 증대시켜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기 위한 조세 수입 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책에 1대 군수인 정인소1915년부터 19183월까지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그리고 3대 군수인 서정악1914년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에 참여했습니다.

 

2. 산미증식계획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1920부터 1934년까지 실시한 농업정책입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들의 대량 이농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으로 식량 수급이 악화되어 1918년에는 쌀소동[米騷動]’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 증산을 통해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부천에는 부평수리조합 1923년 인가되어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리조합원들에게 조합비가 과도하게 부과되고, 일본인 지주들에게는 특혜를 줌으로써 농민들에게 반발을 샀습니다. 또한 농민들은 각종 수해(1925724. 매일신보)와 병충해(193482일 기사. 조선중앙일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농민운동들은 1927년 부평수리조합반대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농민운동이었습니다.

2대 군수인 양재창19274월 경기도부평수리조합 평의원으로, 이듬해에는 부조합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3. 침략전쟁의 강제 동원정책에 적극 협력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전시 체제하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수탈정책을 더욱더 가속화시킵니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 동안 강제 동원이 이루어졌지만 특히 전시체제 이후 더욱더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정책들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각종 법령과 단체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들은 더욱더 뚜렷해집니다.

 

부천군사후원회 결성 소식을 알리는 신문보도
부천군사후원회 결성 소식을 알리는 신문보도

 

부천에서는 19378월 군사후원회(회장 7대 군수 허섭)가 열리고, 1939년에는 부천유도회 결성되었습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조선총독부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 전시체제에 유림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며, ‘황도정신(皇道精神)’에 입각하여 유교의 진흥을 꾀하며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의 취지에 따라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는 국가적 목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유림단체이지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우리나라 젊은 조선사람들에게 일왕을 위해 죽으라는 독려한 것입니다.

5대 군수인 김동완19392월 경기도 부천 지원병후원회가 결성할 당시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12월 조선유도연합회 산하 부천유도회의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8대 군수인 장영한193912월 부천군유도회 회장을 맡았으며 또한 부천군미곡통제조합 조합장을 겸했습니다.

 

부천유도회 결성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부천유도회 결성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이러한 침략전쟁에서 가장 뚜렷한 행적을 남긴 군수를 들으라고 하면 단연 9대 군수인 이윤세를 들 수 있습니다. 헌납한 금액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윤세는 19428월 부천 군민을 대표해 조선군 애국부를 방문해 애국부천호(愛國富川號) 제작비 7만 원을 헌납했는데, 이 비행기는 이해 11월 경기부천군민호(京畿富川郡民號)로 명명되었습니다.

10대 군수인 김홍식은 해방 이후에도 도지사, 장관에도 올랐습니다. 김홍식은 부천군수 전 19397월 평남 양덕군수로 재직 시 황민화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친일 잡지 <내선일체>를 발간하는 내선일체실천사 평안남도지사의 고문을 지냈습니다.

해방 이후 1960510월까지 충남도지사 역임, 19647월 체신부장관을 했는데, 충남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역대 도지사 난에 [친일 인명사전 등재]라고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