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햇볕이 탕탕한 유월은 향기 짙은 꽃이 많다. 휘휘 달려온 밤느정이 향기도 코를 벌름거리게 한다. 구순을 눈앞에 둔 어머니에게 좋아하는 꽃을 여쭈어보았다. 소박한 우리 꽃을 생각했는데, 뜻밖에 빨간 장미라고 말씀하셨다. “찔레꽃도 좋아하지만, 장미는 크고 예쁘며 향기가 좋아서라고 했다. 찔레꽃이 소박한 자태로 짙은 향기를 담고 있다면, 장미는 귀족적이며 화려한 색깔과 매혹적인 향기를 품었다.

장미의 계절이다. 창문을 밀어젖히면 꽃향기가 훅 안겨 온다. 햇살이 꽃잎 사이를 빗금처럼 스며들면 꽃향기가 피어난다. 장미는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마음을 훔치는 마력을 지녔다. 다양한 색깔의 장미가 초록색 잎을 배경으로 돋보이려 자기만의 색을 뽐낸다. 사랑을 고백할 때는 물론, 생일과 결혼기념일, 각종 행사와 잔치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장미에 얽힌 이야기는 끝이질 않는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마음마저 빠져든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마음마저 빠져든다.

 

플로리스트인 필자의 딸이 20148월 교황 프란치스코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명동성당에 꽃꽂이하였다. 남미 에콰도르가 "우애의 표시"라며 6천여 송이의 장미를 보내면서 "남미에서 배출된 첫 교황의 특별한 한국 방문에 에콰도르 장미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더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꽃은 광화문에서 열린 천주교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 제단과 명동성당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때 성전 장식에 쓰였다. 에콰도르 장미는 크기와 다양한 종류, 강렬한 색상, 수명을 보장하는 길고 굵은 줄기로 정평이 나 있어 유럽과 미국 상류층의 고급 행사에 선호하는 꽃이다.

인간의 장미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은은한 장미 향수는 사랑을 부르는 미약(媚藥)으로도 사랑받았다. 서기 2년경에 고대 그리스의 의사 갈레노스가 최초로 장미 기름 향수를 발명하였다. 고대 페르시아의 여인들은 방황하는 연인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약으로 사용했다. 오래전 중국인들이 장미축제 동안 마신 최음제는 말린 자두에 설탕과 올리브를 넣고 장미꽃잎을 혼합해서 만든 것이다. 영국이 지배했던 식민지 여인들도 장미꽃잎을 브랜디에 절여 사랑의 묘약(妙藥)을 만들었다.

 

오묘한 색깔의 아름다운 장미
오묘한 색깔의 아름다운 장미

 

장미는 치명적인 아름다움 속에 위험한 가시를 숨기고 기품 있게 자신을 방어한다. 사랑의 전령 큐피드가 장미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입을 맞추려 하자 놀란 벌이 큐피드의 입술에 벌침을 쏘았는데, 이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비너스가 벌침을 뽑아 장미 줄기에 꽂아놓았다는 설화가 있다. 장미를 사랑했던 시인 릴케는 순수한 모순의 꽃이라고 했다. 평생 아름다운 여인을 쫓으며 시를 쓰고 사랑을 갈구했던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줄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렸다. 가시에 묻어있던 파상풍균과 지병인 백혈병이 더해져 결국 세상을 등졌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한다.

 

 

장미 중에서도 빨간 장미는 유독 강력하게 시선을 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Venus)의 꽃으로 생명의 신비를 나타내는 동시에 정념, 관능, 유혹을 상징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욕망, 열정, 기쁨, 아름다움, 절정을 의미하는 꽃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벌과 나비가 잘 찾지 않는 꽃이다. 벌은 파장이 긴 빨간 색을 잘 보지 못하지만, 파장이 짧은 가시광선이나 자외선에는 민감하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빨간색을 식물 육종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오랜 세월에 거쳐 길러낸 장미이기 때문이다. 야생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하여 진화하지 못했다.

빨간 장미는 특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얀 장미에 입을 맞추었을 때 생겨났다고 한다. 사랑을 관할하는 큐피드의 피가 하얀 장미에 뿌려져 생겼다고도 한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침묵의 신 하포크라테스(Harpocrates)가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가 사랑 나누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 비너스의 아들 큐피드가 침묵의 대가로 하포크라테스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이 뇌물이 세상에 전해진 최초의 장미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빨간 장미를 바치는 화려하고 대담한 행동에는 오랜 역사가 담겨 있다. 고대 로마에서 천정에 장미가 조각된 공간은 침묵의 상징으로 외교관들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를 의미했다.

 

베르네천변의 빨간 장미
베르네천변의 빨간 장미

 

베르네천변에 빨간 덩굴장미가 오뉴월 햇살 아래 요염한 자태를 드러냈다. 까치발 딛고 울타리 타며 창문 너머 안방을 기웃거린다. 덩굴장미는 주로 빨간색이며 덩굴 찔레또는 목향장미라고도 부른다. 색깔에 따라 흰 덩굴장미와 노랑 덩굴장미도 있다. 도당동 백만송이장미원에도 장미가 가득하다. 후각을 자극하여 늦은 밤에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미 필 무렵에야 마스크를 벗었다.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는 시민의 얼굴에 장미보다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빨간 장미를 좋아하신 이유가 있었다. 찡그린 장미가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여성이 색에 민감하고 화려한 꽃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빨간색을 좋아하는 이유를 눈의 노화와 관련짓는다. 인생의 저물녘에서야 꽃을 감상할 여유가 생긴 영향도 있다. 무엇보다도 강력한 빨간색으로 인상 깊게 폈다가 지는 꽃을 보며 젊음을 회상하는 것이 크다. 살아온 순간순간마다 소중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계절이 지나 다시 피는 꽃을 보면서 위로받기 때문이다.

창 너머 빨간 덩굴장미가 소담스럽다. 바람도 한결 순해지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요즘이다. 꽃은 이유를 말하지 않고 피었다가 어느 날 조용히 진다. 피었다 지지 않는 꽃에는 향기조차 없다. 태어났다가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었다가 지는 과정에 삶의 의미가 담겨있다. 장미는 아무에게나 꺾이지 않으려고 가시를 품었다. 우리도 삶을 지키며 향기 머금은 꽃처럼 피었다가 꽃처럼 진다. 배반과 배신의 여인을 상징할 때도 있지만, 순수한 사랑을 고백할 때도 쓰임을 받는다.

장미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향기롭고 로맨틱한 이미지의 전형이다. 꽃을 보며 얼룩진 마음을 말갛게 씻는다. 장미는 절대 한 송이만 피지 않는다. 피고 지고 또 다른 송이를 피운다. 꽃의 눈빛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우리는 모두가 꽃이다. 각자의 삶이 있고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가 있다. 푸르른 날이 지나가 버린 어머니가 애달프다. 사진 속 빨간 장미와 함께하신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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