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2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평수리조합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192349일에 설립이 인가되고 413일 관보를 통해 공지됩니다. 부평수리조합은 부천군의 계남면·부내면·오정면·계양면, 김포군의 양서면·고촌면 내 35()에 걸치는 지역의 수리(水利)를 담당하였는데 지금으로 보면 인천의 계양, 부평, 김포의 고촌, 서울의 강서, 부천의 대장동부터 상동, 중동까지 포함된 거대한 평야에 한강 하류의 물을 양수기로 끌어올려 농업용수를 공급한 사업이었습니다. 조합원은 2.040, 예산액 290만 원, 그리고 물 댈 면적 3.872정 보에 달했습니다.

부평수리조합 창립 초기부터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다수의 일본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으며, 또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조선 농민들은 수세·소작료·조합비 등 감당이 되지 않을 부담으로 파탄하게 되었습니다.

부평수리조합을 통해 100년 전 부천의 모습과 일제의 수탈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부평수리조합 사장 송산상차랑(松山常次郞)

부평수리조합의 초대 사장을 한 송산상차랑(松山常次郞)1922년부터 1924까지 조선총독부 직속기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촉탁과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朝鮮土地改良()]를 세워 중역인 전무이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는 수리조합의 위탁을 받아 토지개량사업을 측량·설계부터 시공·감리까지를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사업은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증가시키고, 조선 농민들의 중소 지주의 몰락을 초래하였습니다. 이 회사의 자본금이 5백만 원이었는데, 그 당시 부천의 친일파 박제봉1924년 수하동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있으면서 월 수당이 60, 1928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월 수당이 80원이었으므로 그 규모가 상당하였습니다.

 

한다농장 - 반전선사랑(半田善四郞)

반전선사랑(半田善四郞)1930년 부천군 계남면 중리 3-1半田農林(한다농장)을 설립하였으며 半田隆一, 半田榮一, 半田八郞 등과 함께 농장을 경영하였습니다. 한다농장은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자본금은 25만 원으로 이 농장의 지금 위치는 도당동에 해당이 됩니다.

 

삼정리 부농 - 수진미삼송(水津彌三松)

수진미삼송(水津彌三松) 씨에 대한 내용은 <1933125일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16일 부천군 오정면 내리에서 삼정리에서 독농가 수진미삼송 씨의 표창식이 있었는데 면장 변영모 씨를 비롯하여 면내 유력자 및 소작인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리 진행되었다는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빈손으로 와서 전답 200여 정보를 소유할 정도로 자수성가를 이룬 인물로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모두 조선 농민들의 피와 땀을 탈취한 성과였습니다.

 

수해(水害)

19257월 부천군은 큰 수해를 입게 됩니다. 많은 비로 717일 동부선 1,600간이 결괴되었으며, 18일 오전 1시에는 서부간선이 결괴되어 부천군 계남, 오정, 계양, 부내면 등 4개 면에 한강 홍수가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날 오전 5시에는 또다시 김포군 양서면 개화리 부근의 제방의 결괴로 부평평야는 삽시간에 진흙으로 덮이게 됩니다.

인명피해도 발생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300명의 익사자가 나왔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물이 주택가로 침투하였습니다. 다행히 경관과 수리조합원들이 목선 2, 김포군에서 목선 3척이 동원되어 많은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구출하였습니다. 부평 역촌 부근에서 아기를 업은 여성만 익사했다고 합니다. 무너진 집은 289, 침수된 집은 376호였으니 그 피해는 농지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명과 재산 피해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점차판명된 부평야의 수재참황. 사자 2명, 도괴 7백
점차판명된 부평야의 수재참황. 사자 2명, 도괴 7백

 

부평수리조합과 지주들의 횡포 그리고 소작인들의 부평농민조합 설립

이러한 시련을 이기고 1926년 처음으로 수확을 했는데 수확량이 예년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지급해야 할 돈은 수확량을 넘어선 거액이었습니다. 일반보 114원으로부터 16580전까지로 그해 수확물 전부를 조합비로 지출하여도 오히려 부족하고 심지어 수확물의 4~5배에 달했다고 합니다. 농사에 도움을 주어야 할 부평수리조합이 지주들의 이익을 침해하고 심지어 농사를 지어도 남지 않고 빚이 더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평수리조합과 조합원인 지주들과의 분쟁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다시 지주와 소작인들의 분쟁으로 확대됩니다. 1927년에 4천 호의 소작인들은 지주에게 농사 전에 소작료로 구답에 대하여는 6, 신답에 대해서는 5할을 내는 것을 약속하였으나 풍년이 들자 추수 후에 상의도 없이 지주들이 구답에 65부 신답에는 6할을 받기로 올려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분노한 소작인들은 농민조합을 창설하게 됩니다. 19271028일 오후 소사역(지금의 부천역) 앞에 있는 정미소 창고 안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조지풍 씨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소작료에 관한 건, 농업자금에 관한 건, 비료 및 농기구에 관한 건, 농업근본방침에 관한 건 등 소작인과 관련된 의제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됩니다. 소작을 통한 농사를 통해 도저히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소작인들은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며, 이러한 부평농민조합 설립 운동은 일제의 수탈에 맞서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운동이었습니다.

이처럼 부평수리조합을 통해 일제의 수탈정책과 부천에서 활동한 일본 관료, 지주 여기에 부역한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다. 추후에 소사산업조합(素砂產業組合), 소사금융조합(素砂金融組合), 소사계리주식회사(素砂計理株式會社) 100년 전 부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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