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3

일제강점기 부천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위치하고 경인선이 지나감에 따라 소사역(현 부천역) 부근이 발전하게 됩니다. 부평평야와 김포평야에서 생산된 벼는 경인선을 따라 일본으로 반출이 되었고, 1900년대 초부터 재배가 된 복숭아 또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발전은 하지만 발전할수록 수탈은 더욱 심해지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옛 소사역은 지금의 부천역으로 부천역 남부지역에는 계남면사무소, 소사소학교, 순사주재소, 우편소, 소사신사, 부평수리조합 등 관공서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이 위치하게 됩니다.

1940년이 넘어서는 지금의 소사역 부근(옛 소사구청)일흥사(日興社)가 만들어집니다. 이름으로 얼핏 판단하면 절()로 오해하기 쉬운데 일흥사는 착암기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1942년에 건설되어 초기에는 착암, 기공기압, 축기 등의 광산용 기계를 생산하였으며 나중에는 군수공업품, 공작기계 등을 제작,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태평양전쟁, 세계2차대전 등 군수물자가 필요함에 따라 일흥사의 주 업무도 변경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흥사에는 어떠한 역사가 들어있을까요?

 

일흥사 관련 기사.
일흥사 관련 기사.

 

첫 번째, 이연형 지사의 독립자금 모금

이연형(1921~2009) 지사는 19373월 경기도 부평군 문학면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910월부터 1941527일까지 홍중(弘中)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습니다. 19417월 윤석균(尹錫均송치호(宋致鎬)의 권유로 조선독립당에 가입하고, 동년 11월까지 독립운동자금 870원을 제공했습니다. 19425월 부천군 소사면 벌응절리 소재 주식회사 일흥사(日興社)로 이직하고 또 독립자금 모집에 노력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연형 지사는 1942627일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3925일 가출옥했습니다. 정부는 이연형 지사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습니다.

 

1921년 부평군 문학면에서 출생한 이연형 선생은 1942년 6월 27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부평군 문학면에서 출생한 이연형 선생은 1942년 6월 27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연형 지사 신상명세서
이연형 지사 신상명세서

 

두 번째, 1942년 경성콤그룹 사건 연루

경성콤그룹은 노동자, 농민, 학생들을 포함해 일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결집하여 인민정부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한 단체로 김단야(金丹冶박헌영(朴憲永김삼룡(金三龍이관술(李觀述) 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일흥사에서 근무하던 여운철, 유진강, 유석하 3명이 치안유지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장 등택덕차랑(藤澤德次郞)

등택덕차랑(藤澤德次郞)은 일흥사 사장인 동시에 소사계리주식회사의 사장(1941~1942)도 맡았습니다. 소사계리주식회사는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609에 본점을 두고, 19360415일 설립되었습니다. 주 업무는 가축 자금의 융통, 비료 자금의 융통, 상업자금의 융통, 가축 및 축산물 매매 및 위탁업, 가축 사료의 판매. 농산물의 위탁판매, 시장위탁경영 및 부동산매매중개업, 지방발전에 관련되어 관공서 기타 단체로부터 위탁받은 업무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업으로 소사계리주식회사는 돈을 많이 벌었으며, 여기에 이사로 참여한 사람 중에는 조선사람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사계리주식회사는 제4회 소사각희대회(素砂脚戱大會)를 주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소사계리주식회사 초기 사장은 신부정웅(神部正雄)(1937~1939)이었습니다. 신부정웅(神部正雄)1914년 소사공립심상소학교 훈도(訓導)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부천에서 120명의 소작인을 두고 신부농장(神部農場)을 경영하였습니다. 면적으로는 70정보(町步), 21만 평에 해당하는 거대한 농장이었습니다. 또한 경기도회(京畿道會) 의원, 부천통운조합(富川通運組合) 결성, 소사경리조합(素砂經理組合) 조직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네 번째, 일흥사의 경방단(警防團)에 대한 기부

일제는 1939년 들어 방공(防空)에 대한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방호단, 소방조, 수방단을 통합하여 경방단(警防團)을 만들었습니다. 경찰서장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하였는데 전국에 결성된 경방단만 2,427개에 이르고 단원 수는 20만 여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소사경방단에 일흥사에서 경방단복 36, 시가로 560원에 이르는 거액을 기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일흥사를 통해 1940년대 부천의 역사를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소사계리주식회사와 관련된 조선인들의 지위와 역할을 통해 그 당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일흥사에서 소사경방단에 경방단복 26착을 기부한 내용의 기사
조선일흥사에서 소사경방단에 경방단복 26착을 기부한 내용의 기사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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