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4

소사계리()1936415일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609에 설립되었으며, 사장(대표)은 일본인이 그리고 이사와 감사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맡았습니다. 소사계리주식회사는 농업, 축산업, 상업 등과 관련된 자금 융통, 위탁업, 판매뿐만 아니라 관공서 등의 위탁을 받아 대행사업을 진행하여 많은 수익을 창출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은 일본에 의해 수탈을 당했으므로 소사계리()에서 임원을 할 정도면 적극적으로 부역을 하였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일정 이상의 지위를 차지하였거나 경제적 이득을 챙겼을 것입니다. 여기에 참여한 조선인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최병희(崔炳熙)

최병희는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586번지에 살았습니다. 1920년대에 인천역전에 공신상회(共信商會)를 개업해 염류 판매 및 위탁매매를 하는 동시에 운송업을 겸영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인천부 해안정에서 동순공사(同順公司)라는 무역상을 하여 많은 부를 쌓아 전답 수십 정보를 가진 지주가 되었습니다.

최병희는 축적된 부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이 극빈하여 생도가 없는 참상을 보고 가마니를 만드는 기계 25대를 나누어주어 생활을 이어가도록 도와주기도 하였고(1933126中央日報), 소사공립보통학교에 국기 게양 탑 일기와 부속품을 기부하여 도지사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934929일 매일신보)

인구 팽창으로 소사에 있던 소사공립보통학교(素砂公立普通學校)의 교실 증축에 즉석에서 1천 원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1936119일 매일신보) 또한 1938년에는 부친의 장례비를 절약하여 소사 소방조에 오십 원, 국방부인회 소사분회에 오십 원 등 국방헌금으로 백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최병희 씨는 선출직 공직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권자 매수행위는 여전했나 봅니다. 부천군 소사면 도회의원 입후보자로 등록한 후 최병희는 이태영과 소래면 신천리 주점에서 동면협의원 이희규와 함께 술을 먹어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인천경찰서에서 비밀리에 수사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이 당시 선거법 위반 첫 사례라고 합니다. (1933.3.17.매일신보)

 

 

2. 이성환(李聖煥)

이성환은 오류 양조장을 경영하였는데 1940년 비상시국에 회갑 연회를 할 수 없다고 하여 천원을 소사경찰관 주재소에 천원을 헌금하였습니다. 500원은 국방헌금으로 그리고 나머지 500원은 소사면 내의 수해 이재민에게 사용하도록 기부하였습니다.

 

 

3. 원인상(元仁常)

원인상이라는 인물도 최병희와 같이 활동 반경이 꽤 넓으며 관련된 기관 또한 많습니다.

원인상은 남길우(南吉祐), 변영모(卞榮謨)와 함께 소사금융조합(素砂金融組合)에서 이사를 하였으며(1937714일 조선총독부 관보), 부천군 소사면 면협의회원에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1939531일 매일신보)

1938년에는 소사면 공회당에서 관공서장 및 기타 관계자들 300여 명이 모여 소사면 방공본부를 결성할 때 부부장(副部長)을 맡았습니다. 이 당시 본부장은 신부정웅(神部正雄)이었습니다. ( 193871일 매일신보) 1939년에는 변영호 후임으로 동아일보 소사지국(素砂支局) 지국장(支局長)이 되었으며 1939년 부천유도회결성 때 교화부장을 맡았다. (19391217일 매일신보)

해방 후에는 삼형상사[三兄商事()]를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 421에 차려서 연탄 사업을 하였습니다. (출전 1959 광업및제조업사업체명부, 한국산업은행)

 

4. 장최근(張最根)

장최근은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 중매인(仲買人)이었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말 그대로 쌀과 콩, 즉 곡물을 거래하는 곳으로 미두취인소는 일본이 한국의 쌀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생기면서 일본 상인과 일본인 정미업자가 직접 거래를 하며 유통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5. 최원기(崔源基)

최원기는 소사정미소(素砂精米所)를 운영하였습니다.

 

일본은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지역에 관공서 외에도 여러 금융, 농업, 수산업, 임업 등 기관들을 세워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기관들과 여기에서 근무한 조선인들의 연관성을 이해하면 이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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