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심리’ 17

춘화(春畫)를 그린 46그램짜리 골프공 한 개가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이왈종(李曰鐘, 1945~) 화백은 골프장 풍경을 즐겨 그리는 동양화가다. 시원한 비취 색깔의 제이드 그린(jade green)을 배경으로 골프를 즐기는 사람을 그린 작품의 인기가 대단하다. 그가 사랑한 제이드 그린에 숨어있는 삶의 철학과 색채 심리를 살펴본다.

경기도 화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왈종은 그림을 좋아해서 중앙대 회화과를 다녔다. 국전에 작품을 출품할 때 같은 이름의 출품자와 겹치지 않으려고 이왈종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본명은 이우종이다. 1974년 제23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과 2001년 월전 미술상을 받았다. 1979년부터 12년간 추계예술대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했으나, 민주화 운동으로 학교 수업이 중단되는 때가 많았고, 그림에 집중하기 어려운 현실에 지쳐 있었다. 1991년 돌연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혼자 제주로 내려갔다.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2013, 장지에 혼합재료, 187x224.5cm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2013, 장지에 혼합재료, 187x224.5cm

 

그는 밥 세 끼 먹고 그림 그릴 공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그림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겼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정방폭포가 보이는 낡은 양옥집을 사서 화실로 만들고 그림에 매진했다. 서울에 남아있는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더욱 그림에 몰입하였다.

제주 서귀포 한라산 중턱에 자연을 빚은 듯한 골프장이 있다. 1998년 개장한 핀크스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100대 골프 코스에 든 명품 골프장이다. 세계적인 재일 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제주의 전통미를 살려 설계한 클럽하우스는 위에서 보면 건물이 포도송이처럼 엮어있어서 포도호텔이라고도 부른다. 제주의 오름을 날아오르는 과 판소리의 리듬에서 영감을 받았다. 자연과 공존하는 하나의 예술품이 된 호텔로 이타미 준은 김수근 건축상과 프랑스의 예술 훈장인 슈발리에, 일본 최고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휩쓸었다. 이 포도호텔 곳곳에 이왈종 화백의 손길이 닿아 있다. 그는 프런트 데스크를 장식한 벽화(270640cm) 이외에도 벽시계와 각종 장식을 디자인했다.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2020, 장지에 혼합재료, 80.5x100.5cm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2020, 장지에 혼합재료, 80.5x100.5cm

 

20여 년 전 골프 그림을 처음 전시할 때만 해도 어려움이 많았다. 갤러리 측에서는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주제라고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전시했던 작품이 모두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때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해 전국 골프장 클럽하우스 곳곳에 그의 골프 그림이 걸려있다. 전성기를 맞은 그의 작품가격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춘화를 그린 작품이 전시회에서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을 그려 넣은 골프공 한 개가 수백만 원에 거래되는 인기 품목이 되었다. 화단의 거센 비난에도 생명의 원천인 ()’이 리얼한 우리 삶의 풍경이다라고 말하며 화가들에게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하게 그릴 것을 강조했다.

 

이왈종 춘화 골프공
이왈종 춘화 골프공
이왈종 춘화
이왈종 춘화
이왈종 춘화1
이왈종 춘화1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모든 게 바람 한 점에도 못 미치더라.”라고 말했다. 화려함보다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불교 교리 중 하나인 중도(中道)’로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평소 애독하던 <반야심경>의 영향이었다. 화려함을 추구하면 집착과 욕심에 치우치고 갈등과 번민으로 상처받는다. 이왈종은 중도적 삶을 통해 얻은 행복을 제이드 그린으로 표현했다. 특수 제작하여 2cm가 넘는 두꺼운 닥종이(장지)에 서양 물감인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작품을 연작으로 그렸는데 제주 생활의 중도(Golden Mean of Jeju Living)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주생활의중도 2020, 116.8x91
제주생활의중도 2020, 116.8x91
이왈종 화가
이왈종 화가

 

필자는 지난 5, 그의 2013년 작품 제주 생활의 중도를 서울 갤러리에서 관람했다. 거대한 크기(187224.5cm)의 캔버스에 충만한 제이드 그린이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눈부시게 화사한 색상에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넘쳐흘렀다. 활짝 핀 하얀 매화 사이로 노란 새들이 우아한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형태로 조성된 잔디 위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여 작품 안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런 상상을 하자, 코로나 기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걱정하며 마음졸였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이 고개를 돌려 무언가 말하는 듯했다. ‘힘들었지? 이제 쉬어가자라고 다독이며 위로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상하이에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중국문화를 경험했다. 숙소는 취직하기 위해 중국 각지에서 온 20대 초반의 청년들로 북적거렸다. 내게 친절했던 루루는 여러 차례 외국계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녀는 취업에 성공한 젊은이들이 속속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초조함으로 애간장을 태웠다. 비취 색깔로 그린 소녀 그림을 선물했다. 그녀는 긴장하고 불안할 때마다 수시로 비취색 그림을 만지작거리며 소원을 빌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루루는 홍콩계 은행인 HSBC 상하이지점으로부터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황금이 발견되기 전 제이드(jade, , 비취)는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1711~1766) 때부터 미얀마에서 최상급 비취가 공물로 들어오면서 중국인의 열렬한 비취 사랑이 시작되었다. 동양의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비취는 장식품과 예물로 애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영혼을 부활시키는 기운이 있다고 여겨졌다. 비취를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문화가 있었다. 지금도 비취는 사악한 기운을 쫓고 큰 재물과 행운과 건강을 부르는 신성한 보석으로 사랑받는다. 청혼하거나 아기가 태어났을 때 비취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영롱한 비취 색깔 제이드 그린은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심신이 지쳤을 때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활기가 생긴다. 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제이드 그린을 좋아하는 사람은 차분한 감성을 지녔고 가족 친화적이다. 너그럽고 사랑으로 주변을 보살피는 사람이다. 이 색에 부정적인 사람은 소유욕과 질투심이 넘치고 과도하게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제이드가든 수목원
제이드가든 수목원
제이드가든 수목원
제이드가든 수목원

 

강원도 춘천시에 짙은 제이드 그린 빛깔의 화려한 정원이 있다. 싱그러운 여름 감성이 물씬 나는 <제이드가든 수목원>KBS 2TV 인기 드라마 신사와 아가씨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풍의 건축물과 26개의 유럽식 정원으로 구성되었다. 이국적인 정원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 생명력과 활기를 얻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에너지를 충전하기 좋다.

이왈종 화백의 작품에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제이드 그린 컬러가 가득하다. 시각적으로 시원한 청량감을 주어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집착과 갈등을 내려놓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색채다. 이 아름다운 컬러의 소품으로 주변 공간을 꾸며보자. 산뜻한 제이드 그린으로 평화를 누리며 여름을 보내길 기대해본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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