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6

일제강점기 부천군에서 장기간에 걸쳐 면장을 했던 사람 중에 현재의 관내로 줄여 살펴보면 오정면에 변영모가 있었고 소사면에는 원영상이 있었습니다. 원영상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소사면장을 하였습니다. 면장을 했던 원영상의 행적을 통해 그 당시 소사면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 그리고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폈던 수탈과 억압 정책을 알 수 있습니다.

 

1. 소사금융조합장(素砂金融組合長)을 놓고 벌인 치열한 선거 원영상과 이도영

19334월 소사금융조합장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원영상과 이도영은 치열한 득표전을 펼칩니다. 1932년 당시 오정면장은 변영모, 소래면장은 이도영이었는데 李元兩派對立...(이원양파로 대립..)’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두 면장은 치열한 선거전으로 개표결과 똑같이 17표를 얻게 되는데, 동수 득표로 연장자인 이도영이 조합장에 당선되자, 패자측인 원영상의 불평으로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합니다.(1933420일 매일신보)

패배의 아픔을 경험한 원영상은 1934, 꿈에 그리던 소사금융조합장에 당선이 됩니다. 이도영이 사임함에 따라 재선거가 이루어지고 원영상이 당선되는데 신문에서는 민완가(敏腕家), 즉 일을 재치 있고 빠르게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1934912일 매일신보)

그렇다면 면장인 이들이 조합장이 되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소사금융조합이 부천군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면 이러한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추후에 소사금융조합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2. 소사공립보통학교 증축

1930년대 들어 경인선 소사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소사면은 인구가 크게 증가합니다. 이로 인해 학생수도 증가하여 기존 교실로는 학생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에 소사면장인 원영상은 최병희씨를 중심으로하여 소사공립보교 증급기성회를 창립하고 증축비를 모금합니다. 기성회장인 최병희, 도회의원인 신부정웅(도회의원) 그리고 면협의원인 원인상을 대표로 선임하고 5천원의 기금을 모은 후 허섭부천군수에게 증축할 수 있도록 진정을 합니다.

 

3. 소사방공본부(素砂防空本部) 결성

일제는 방공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71일에 경기도방공훈련연습을 진행하며 경계경보에 의해 도민 전체는 방공준비에 착수하게 됩니다.(193873일 동아일보) 이에 따라 부천군 소사면에서도 방공본부가 결성되게 됩니다. 19387월 소사면 공회당에 각 마을 가정방호조합조장, 각관공서장 및 기타관계자 3백여명이 모여 소사방공본부를 결성합니다. 이러한 결성식 진행은 황거요배와 황국신문 서사를 제창하는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같은해 11월에는 소사와 오정 방공단을 통합하여 소사오정방공단을 결성하게 되는데 원영상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합니다.

 

4. 소금용 가마니 생산 독려

원영상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염용입(소금용 가마니) 10만 매를 목표로 삼아 각 리에 할당하여 생산하도록 독려를 합니다. 1939년 당시 침략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제는 면장을 통해 생산력 확대를 통한 생업보국에 매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면장인 원영상은 일제의 정책에 적극 동조합니다.

 

5. 여자청년단(女子靑年團) 결성

일제는 노동력 동원을 위한 조직으로 여자청년단과 같은 여성 조직을 만듭니다. 추후에 확대되어 육군과 해군 같은 군()에 여자군속이 동원되었고, 여학생 또한 동원의 대상이 되는 등 전쟁 시기 여성에 대한 동원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19402월에 소사북소학교 강당에서 장영한 부천군수 이하 내빈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소사여자청년단 결성식을 진행하였습니다. 단장에 소사면장 원영상, 부단장에 소사북소학교장 천엽창치(千葉昌治), 소사남소학교장 혜량 번(惠良繁), 오류소학교장 복정덕길(福井德吉)이 선임되었습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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