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엄마를 여읜 딸이 가장 크게 설움을 느낄 때가 출산할 때가 아닐까. 조카가 아기를 낳았다. 마지막까지 외로이 남겨질 딸을 걱정했던 언니 생각에 나는 조카의 산바라지를 자청했다. 한 달만 조카의 엄마가 되기로 했다.

해외에서 출산하다 보니 산후조리원은 없고, 산 후 도우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그저 미역국을 끓이고 불고기며 잡채며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만들고 끊임없는 질문과 걱정에 함께 고민해 주면 되었다. 어느새 의젓한 엄마가 되어 가는 조카의 모습이 흐뭇하다. 한 달쯤 지나며 그럭저럭 한고비를 넘겼다. 산모도 안정되고 아기도 제법 똘망똘망해졌다. 나도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초보 엄마는 틈만 나면 인터넷을 검색한다. 딸꾹질할 때는 어찌해야 하는지 변 상태는 양호한지 손가락이 바쁘다. 인터넷 쇼핑이며 병원 예약이며 페이스북에 사진 올리기까지 스마트폰을 잠깐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24시간 함께하는 집사이자 선생님이다. 그런 유능한 집사와 나는 가끔 경쟁해야 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시합이다. 아기가 엄마 젖을 찾는다. 수유 양이 부족하니 더 주라고 거들었더니 조카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응대한다. 3시간마다 80cc. 딱 맞아. 과식하면 토해서 안 돼. 기도가 막히면 큰일이라고 한다. 저런. 조금만 더 먹이면 아기도 오래 자고 너도 쉴 수 있을 텐데. 구식인 이모는 말을 삼킨다. 스마트폰에 밀렸다.

간밤에는 조카의 집사가 제대로 역할을 못 했나 보다. 2시간밖에 못 자서 다크서클이 눈 밑에까지 내려앉은 조카는 심기가 불편하다. 아기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 알았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 비명을 지른다. 인공 수정으로 얻은 아기라 임신과 출산, 육아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박사더니 인제 와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헛똑똑이가 따로 없다. 너도 그렇게 컸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잘할 수 있어. 엄살도 있겠지만 푸석한 얼굴이 안쓰럽다.

 

구스타프클림트 'The Three Ages of Woman' 부분
구스타프클림트 'The Three Ages of Woman' 부분

 

어쩌면 정말로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에 없을지도 모른다. 처음 하는 일에는 누구나 긴장하고 각오를 다진다. 인터넷이나 관련 서적을 찾고 경험자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훌륭한 결과를 얻고 싶을수록 더욱더 바쁘다. 막상 조사해 놓은 수많은 정보가 쓸모없을 때는 불안해진다. 가까스로 얻은 아기이니 오죽하랴. 어떻게 해야 행복한 엄마가 되는지 행복한 아이로 자라는지 초보 엄마의 불안이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조카의 집사는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되돌아보니 나 또한 헛똑똑이던 시절이 있었다. 육아서를 높이 쌓아놓고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얕은 지식에 매달려서 우왕좌왕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나의 성공담과 실패담이 인터넷 검색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필요할 때마다 서랍 속의 경험을 하나씩 꺼내 줘야겠다.

조카의 말처럼 여자의 인생은 엄마가 되기 전과 후로 달라진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내가 주인공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엄마가 되면서 자연스레 아이가 주인공으로 삶의 중심이 옮겨간다. 커리어 우먼이던 조카도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슬그머니 아기에게 자신의 중심을 내어준다. 바깥세상은 안중에도 없다. 본인의 수면이나 식사도 뒷전이다. 모유 수유니 기저귀니 하며 온종일 아기의 상태가 그 무엇보다 중하다. 아기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엄마가 되었을 때도 저리 긴장되고 걱정거리가 많았던가 하고 새삼스레 엄마 자리의 무게를 실감한다.

나만을 생각하던 생활에서 아이가 중심이 되다 보니 처음인 것이 투성이고 책임이 버거운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조카가 아이에게 삶의 중심을 내어주어도 여전히 총명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스스로를 갈고 닦아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왔듯이, 직장과 육아 사이의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고 인생을 즐기며, 이십 년 후에도 당당한 여인이면 좋겠다. 아기가 매일매일 애쓰며 커가는 것처럼 조카도 헛똑똑이에서 똑똑한 엄마이자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겠지.

한 달 엄마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스마트폰을 쥐고 아기를 자꾸 울리는 병아리 엄마가 미덥지 않다. 수유 시간이니 수유 적정량이니 신경 쓰지 말고 배불리 먹이고 많이 안아 줘. 엄마 품이 최고야. 잘하고 있어. 언제든 전화하라고 일렀다. 하늘나라에서 지켜보는 언니가 웃는 듯하다.

 

| 이전리(2021년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솔샘문학회 회원)

 

이전리 수필가
이전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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