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심리’ 18

수천만 원이 넘는 사과 그림이 있다. 2년을 기다려야만 간신히 구매할 수 있다는 희소성이 고가행진을 이어가는 비결 중의 하나다. 복을 듬뿍 담은 커다란 사과가 궤짝째 쏟아질 듯한 그림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한다. 사과 그림은 재물과 행운을 부른다는 속설에 따라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하여 집안에 장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윤병락, 「청사과」, 22.5x22.5cm, 한지에 유채, 2019
윤병락, 「청사과」, 22.5x22.5cm, 한지에 유채, 2019

 

사과 화가로 불리는 윤병락(1968~ )의 작품에 새콤달콤한 아오리사과가 수북이 담겨있다. 사과의 밝고 따뜻한 옐로 그린(yellow green, 연두색)에 인기의 비밀이 숨어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그는 사과나무가 지천인 농촌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과일나무를 기르고 어머니는 과일 행상하며 교육비를 마련해주었다. 가족에게 과일은 생계 수단이었다. 서울로 유학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을 고려해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서양화과를 다녔다. 옛 정취가 물씬 나는 사물을 극사실주의 기법(사진보다 더 실물처럼 표현하는)으로 그렸다. 1993, 대학교 3학년 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묘사력이 돋보이는 작품 기억재생으로 특선을 수상하였다.

2003년 길거리에서 좌판에 사과를 무더기로 올려놓고, 그 옆에 궤짝째 파는 것을 보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고향 생각이 나고, 자신을 위해 부모님이 흘린 땀방울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다.

2008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작품 가을향기가 약 7,300만 원에 거래된 것을 계기로 사과 화가로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2018년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하루 1~3시간 이상 잠을 자 본 적이 없어요. 지방대학 출신이라 믿을 구석이 없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어요.”라고 밝혔다.

 

화가 윤병락
화가 윤병락

 

그가 얻은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롯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하루 12시간 이상씩 작품에 몰입한 작가정신 때문이었다. 1년에 겨우 60여 점을 그리지만, 수요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상자에 사과를 가득 담고 자연광이 잘 드는 야외에서 촬영한다. 목공실을 갖춘 화실에서 견고한 자작나무 합판으로 캔버스의 틀을 직접 만들고 두툼하게 배접한 한지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린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세밀하게 그린 사과는 한입 깨물면 달콤한 즙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오감을 자극하는 상큼한 사과에서 진한 단내가 풍기는 듯하다.

 

윤병락, 「청사과」, 244.5x110cm, 한지에 유채, 2013
윤병락, 「청사과」, 244.5x110cm, 한지에 유채, 2013

 

2013년에 그린 작품 청사과에 가득한 옐로 그린은 온화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새콤달콤한 아오리사과(청사과, 풋사과)는 일본에서 홍옥과 골든 데리셔스를 교배해서 만든 품종이다. 그는 평소 사과는 사람과 같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작품 속 사과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사람처럼 생김새와 크기가 제각각이고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도 없다. 커다란 크기(244.5110cm)의 캔버스에 그린 그림에는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10대 학생처럼 풋풋한 사과들이 생기발랄해 보인다. 사과 궤짝에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연둣빛의 통통한 청사과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수다 꽃을 한창 피우고 있는 것 같다. 붉은색으로 예쁘게 차려입은 홍일점 사과가 나뭇가지로 꼭지가 누런 사과에게 함께 놀자고 손을 내미는 정겨운 모습이다. 따뜻하고 화목한 풍경이 펼쳐진 옐로 그린의 사과 교실에서 행복이 넘쳐나는 듯 평화롭다.

 

윤병락, 「녹색 위의 붉은 사과」, 102.5x105.5cm, 2010.
윤병락, 「녹색 위의 붉은 사과」, 102.5x105.5cm, 2010.

 

사과는 인류 역사에 자주 등장했다. 서양의 기독교 사상과 철학을 담은 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라틴어로 악(, malum)과 사과(mālum)의 철자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성경에 등장한 이후, 수많은 예술품에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는 선악과를 사과로 표현하였다. 영국의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과학적 사고방식의 장을 열었고, 20세기 초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이 원근법과 시점을 무시한 사과를 110점이나 그리며 현대미술의 물꼬를 텄다. 스티브 잡스는 복잡한 정보통신 기술에 인문학을 접목하여 애플사를 창립하며 21세기 기술 혁신을 이끌었다. 애플사의 상징인 벌레 먹은 사과는 낡은 과거를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한 도전 정신이 들어 있다.

 

애플사 로고(사진출처 애플코리아)
애플사 로고(사진출처 애플코리아)

 

옐로 그린은 노란색과 초록색의 중간색이다. 파릇파릇 연한 새싹의 색으로 따뜻하고 온화하며 생명력 있게 위로 자라나는 힘이 있다.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요구하는 디자이너와 제작자와 기획자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상이다.

이 색깔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재다능하고 모험심이 있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교적이지만, 잦은 만남에 쉽게 지치고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무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색상은 주인공의 성격이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다. 2017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 운전사>는 실제 인물인 위르겐 힌츠페터를 모델로 하였다. 19805월 광주민중항쟁을 목격한 독일 외신기자의 탈출을 돕기 위해 주인공 김만섭(송강호 역)이 아찔한 곡예 운전을 펼친다. 상영 내내 관객은 옐로 그린 색의 택시와 하나가 되어 손에 땀을 쥐며 그들의 긴박한 탈출 여정에 동참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제작진은 영화의 주요 공간인 택시의 차종과 색상의 선택에 심혈을 기울였다. 기아자동차 차종인 브리사(Brisa)’를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자 동남아를 다 뒤져서 찾아냈고 영화를 찍기에 적합하도록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둥글둥글 온화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성격의 주인공과 어울리는 옐로 그린 택시를 연출하기 위해서 십여 차례나 도색을 바꾸며 정성을 들였다. 그 택시는 같은 해 광주에서 열린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전시관의 로비에 전시하여 큰 인기몰이를 하였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다음영화)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다음영화)

 

명시성이 높은 색상의 기업 로고는 브랜드를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친환경 먹거리의 대표회사인 풀무원은 사람의 건강한 미소와 자연을 담은 큰 접시를 세련된 옐로 그린 색 로고로 만들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NAVER)의 대표 색상은 젊음, 신뢰, 중립을 상징한다. ‘인터넷을 항해하는 사람에게 신뢰할 수 있는 친절한 인도자라는 뜻을 품고 있다. 2018년 신무경의 저서 <네이버는 어떻게 일하는가>에서 네이버는 탐험가가 아마존 같은 정글에서 목표한 것을 찾아내듯이 인터넷 정글에서 정보를 찾아낸다는 점에 착안하여 옐로 그린을 대표 색상으로 정했다.’고 주장했다.

복이 넝쿨째 굴러오는 사과 그림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타인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사람과의 접촉으로 피곤할 때 잠시 멈추어서 온화하게 마음을 감싸주는 옐로 그린을 떠올려보자. 지치기 쉬운 무더운 여름, 상승의 기운을 주는 행운의 컬러로 즐거운 추억과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보자.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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