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아침이면 베란다 정원의 새 식구 떡갈나무 새싹과 눈을 맞춘다. 공기정화를 해준다는 여러 종들과 앙증맞은 다육식물들을 매일 들여다보며 일과를 시작하는 버릇은 오래되었다. 간밤에 얼마나 자랐을까, 새 꽃대라도 올라왔을까, 변화를 기대하며 아침을 맞는 것이다. 베란다 한편에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떡갈나무가 새잎을 밀어올린 화분을 발견한 후에는 더욱 그 변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새로 이사를 하면서 지인에게서 받은 집들이 선물은 해피트리 화분이었다. 녀석은 한동안 거실 풍경을 우아하게 꾸며 주어 나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했나, 수명이 다 했나 시간이 갈수록 시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아주 말라죽고 말았다. 빈 화분을 보려니 마음이 영 언짢아 무엇이든 심어놔야 했다. 장난처럼 지난 가을에 주워온 도토리 한 알을 빈 화분에 묻어두었다. 이 녀석이면 금세 싹을 틔우고 큰 잎을 펼쳐 나를 위로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서 성급하게 새싹이 나오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도토리 싹은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는 혹시 풋고추를 먹을 수 있을까하고 고추 모종을 사다 화분에 심었지만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그러던 올해 초 어느 날 놀랍게도 도토리가 작은 떡잎을 내밀었다. 늦었지만 도토리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제 본분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애초 엄마 나무 곁에 굴러 떨어져 그대로 숲에 있었다면 비와 바람과 적당한 햇볕으로 좀 더 일찍 새싹을 밀어 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으로 마주했으니 기쁨도 커 매일 들여다보며 물도 주고 햇볕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화분을 옮기며 신경을 썼다. 보답이라도 하듯 작은 잎이 조금 큰 잎으로 자라나와 제법 화분과 잘 어울렸다. 도토리 하나를 묻었을 뿐인데 초록을 만나는 기쁨을 내게 주니 마음은 이미 떡갈나무 열매를 본 듯 뿌듯하기만 하다.

도토리가 늦게 싹을 틔워 나를 기쁘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와 저 더딘 늦잠꾸러기는 분명 닮은 데가 있는 것 같다. 새싹을 틔우는 과정이 늦은 식물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속도가 늦는 사람이 분명 있으니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한참 느린 나로서는 그럴 때마다 늘 뒤처지는 느낌이다. 저마다 가진 능력도 재량도 각기 다르니 당연하려니 하면서도 유쾌하지는 않다.

나는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은 속도보다 방향이라고 하던데 방향을 잘 잡고 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늦게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하고 이후 수필이라는 장르를 선택했고 나름대로 정진하고 있다. 편하게 쓰는 글인 줄 알았는데 배울수록 여간 어렵지 않다. 예리하고 독특한 영감이 번득이면 좋으련만 마음에 드는 글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느 작가의 꼴찌에게 박수를이라는 문구에 나는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꼴찌라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한다면 분명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리라. 같은 시기에 심은 씨앗도 열매를 맺는 시기는 각기 다를 수 있다. 늦잠에서 깨어난 녀석은 연이어 두 잎 세 잎 밀어 올린다. 나도 뒤늦게 시작한 글쓰기라 한참이나 늦된 것 같아 조급하기도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보다 재능이 없다면 노력을 더 하리라 마음도 굳게 먹는다. 시작이 남보다 조금 늦다고 결과물이 꼭 늦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라도 함께 공감해주는 글, 진한 묵향이 묻어나는 참 글쟁이가 되고 싶다. 가슴에 품은 꿈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더 고귀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한 가지 일에 매달리면 끝까지 하는 성격으로 중도에 그만두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미련한 짓 아닌가 하면서도 어찌 됐든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다가 성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면 쉽게 바꾸기도 하고 옆길로 새기도 하는데 나는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면 쉽게 바꾸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결과를 보는 때가 더 많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성장이 빠른 아이들도 있고 발육이 늦는 아이도 있다. 습득지점이 각기 다른 개개인의 특성 중에 나는 습득이 늦는 사람이지만 끈기 하나만은 자신한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껏 살아온 삶을 통해서 소중하게 찾은 자기 위안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괜찮은 사람으로 거듭나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곤한다. 그 딱딱한 껍질을 벗고 나온 도토리처럼 나의 굳어가는 전두엽이 다시 활기를 띤다면 좋을 것 같다. 감각을 깨우고 어휘 채집을 하고 좋은 문장의 싹을 틔울 수 있다면 더 바람이 없겠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 머리 좋은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더 우수하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싶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해, 마음 같지 않지만 늦되는 아이처럼 느리게 느리게라도 한 걸음씩 내디딘다. 달팽이가 느리게 가도 아침이슬 머금은 초록풀밭에 가 닿는 것처럼, 더디고 무딘 사고력을 좀 더 유연하게 키우며 세상을 바라보리라. 생각이 더 깊어지면 글맛도 더 진해지지 않을까.

떡갈나무에 도토리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아니 그보다 먼저 녀석을 햇볕 내리 쬐는 야생 어딘가로 옮겨주어야 할 것 같다. 잠시의 몸살은 앓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녀석은 야생에서 더욱 빛이 나리라. 나도 도토리의 길을 갈망정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갖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나의 수필 정원에도 탄탄한 도토리 새싹 하나 피워낼 수 있지 않을까.

 

| 이길순(한국문인협회회원, 한국본격수필가 협회회원, 세종문학상 수상, 수필집 몸을 퇴고하다)

 

이길순 수필가
이길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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