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칼럼

요즘 제게 심각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바로 내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입니다. 어릴 적부터 건망증이 심해서 웬만한 실수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성격인데도 요즘의 제 건망증은 저 스스로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입니다.

일하면서 만나는 분들이 요양보호와 관련된 분들이기도 하고, ‘주위에 가족이 치매에 걸린 분들에게 듣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면?’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공포가 밀려옵니다. 비싼 간병비를 지불하며 요양병원에 입원한 부모님이 욕창이 생겨서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도 하고, 좋은 요양병원 찾아서 먼 지방까지 수소문해서 내려갔다는 이야기 등, 예전에는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돌보는 자식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는데 제 관심이 쏠렸었다면, 지금은 가족과 떨어진 곳에서 지내면서, 코로나로 인해 면회도 되지 않는 노인들의 고통에 더 많은 안쓰러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제가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 겁니다.

 

돌봄종사자에서 돌봄대상자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돌봄으로 삶을 시작합니다. 아기를 출산한 엄마는 출산 후 약 6개월 정도는 아기에 미쳤다라는 심리학적 판단을 할 만큼 아기에게 몰입을 하며, 아기에게 무조건적 돌봄을 제공합니다. 그런데도 아기는 조금이라도 돌봄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울어댑니다. 그러면 엄마는 모든 걸 제치고 아기에게 달려갈 수밖에요.

아기가 성장하면서 돌봄은 조금씩 분산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남편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에게도 조금씩 주의를 돌리게 되지요. 이들과는 돌봄을 주고받으며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난 이제 바보가 된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78세부터 5년을 혼자서 잘 살아내셨습니다. 매주 두 번씩 부천생태박물관에서 식물해설사를 하시는 것이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배우고, 친구들을 모아서 함께 배 타고 일본 여행을 다녀오실 만큼 삶에 적극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러다 82세부터 조금씩 치매 증상을 보이면서 엄마의 삶의 영역이 밖이 아닌 집안으로 제한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를 좌~악 꿰던 총명함이 엄마에게서 스멀스멀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조리기능을 상실하고, 자식들이 해다 준 음식은 냉장고 안에서 곰팡이가 피었고, 정기적 모임인 초등학교 동창회도 혼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치매 예방의 특효는 관계 맺기

큰딸인 제가 엄마의 돌봄종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지만 두 달 만에 도망치듯 본인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고심 끝에 제가 엄마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고, 이것은 제 인생의 최고의 결정이 되었습니다. 몇십 년 만에 엄마와 함께한 일상생활은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바로 안정을 찾았습니다.

엄마의 일상 변화를 이야기해보면, 병원에서 3개월 치 약을 받아오면, 15일 정도 분의 약이 부족해서 병원에서 다시 타오기를 반복하던 엉망진창 약 관리가 정상적인 약 복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며느리와 딸이 반찬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드려도 거의 챙겨 드시지 않아서 곰팡이가 피었는데 이제는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집안에서의 유일한 친구는 TV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매일 이야기할 수 있는 가족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물어보고 되풀이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몇 달에 한 번씩 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던 일들이 없어졌습니다. 건강이 좋아지면서 밖에 산책 나가는 일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공공자원 이용하기

엄마가 장기요양 4등급을 받고 나서 방문요양보호사를 집에 부르려고 하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돌보는 사람이 온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으신 듯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설득했습니다.

엄마, 요양보호사가 집에 오면 내가 훨씬 편해.”

그래, 네가 좋으면 해야지.”

매일 3시간씩 엄마의 돌봄에 집중하는 요양보호사가 우리 집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양보호사는 엄마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야기에도 전혀 짜증을 내거나 지루해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엄마를 위한 과거와 현재를 함께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일상생활은 조금씩 보통 노인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렇게 5년을 가족들과 함께 사시다가, 2년 전쯤 엄마는 낮잠 주무시는 것처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마지막 아침 식사로 커피와 구운계란, 쑥찰떡을 드시고, 아빠와 산책 나가는 증손자의 신발을 신겨주신 것이 엄마가 이 세상에서 하신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저는 1년 전부터 부천시장기요양요원지원센터에서 일하면서 노인성 치매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장기요양에 관련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치매는 치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관계와 돌봄, 정확한 약 복용과 노인에게 적절한 식사 제공이 엄마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엄마를 보내고 저는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생겼습니다.

엄마만큼, 엄마처럼만 살다가 떠나고 싶다

 

| 이영주(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 부천시장기요양요원지원센터장)

 

이영주 이사장
이영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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