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대학 시절 서울의 H대 앞에는 유난히 생맥줏집이 많았다. 그중에서 내가 자주 갔던 곳은 1번 강촌, 2번 땡과 따라지, 3번 계단집, 4번 용인집, 5번 부산집 순이었는데 오늘은 1번 강촌 생맥줏집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한다.

강촌의 50대 중반 사장 아주머니는 내가 가면 항상 호의적이었고 외상도 무척 잘해줬는데 그때는 매상을 많이 올려줘서 그러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80년대 후반)는 미술학원을 하면서 한 달에 몇백씩 벌던 시절이라 거의 하루걸러 강촌집엘 갔다. 한번은 연속해서 며칠을 간 적이 있었는데 탁자 4개 밖에 없는 가게에 갑자기 여학생 아르바이트생이 나타나더니 그것도 날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여학생 3명이 번갈아 가며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참 지나고 나서 강촌을 찾았는데 사장 아주머니가 내게로 오더니 혹시 아르바이트했던 여학생 중에 마음에 든 애 없었냐고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별로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고 하니 너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섭섭하고 낙담한 표정을 지어서 나는 사장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 난감했었다. 그 시절 나와 같이 학교생활을 했던 친구들이라면 강촌 사장님 선한 얼굴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술대학 학생회 친구들과 함께(왼쪽 첫 번째가 최의열 화가)
미술대학 학생회 친구들과 함께(왼쪽 첫 번째가 최의열 화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촌 사장님은 딸 삼 형제 엄마였고 아르바이트생들은 사장님의 세 딸이었던 것이다. 잘생긴(?) 내가 마음에 들어 사위 삼으려고 딸 셋을 선보여줬던 것인데 내가 그렇게 관심 없어 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그 무렵 내가 다니던 H대 미술대학에는 예쁜 여학생들이 참 많았다. 서울에 있는 남자 대학생이라면 우리 학교 여학생들하고 미팅 한번 하고 싶어 줄을 서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솔직히 여학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비록 친구들에게 이끌려 몇 번 사계절다방, 남영동 목로주점 등을 전전하기는 했지만.

 

대학원 시절
대학원 시절

 

이듬해,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됐는데 기념으로 학교 주변 술집 외상값 청산에 나섰다. 무려 4백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물론 강촌이 제일 많았고, 계단집 등 순이었는데 땡과 따라지에는 외상이 없었다. 거기 사장님은 나이 지긋한 60~70대 할머니셨고 또, 생맥주잔에 술을 거품 없이 철철 넘치게 따라주셨기에 외상은 안 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그동안 돈 많이 벌었을 테니 결혼자금 좀 내놓으라고 하셨다. 외상값 정리하고 남은 돈 2백만 원을 드렸더니 그냥 웃고 마셨다. 그때 엄마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조촐하게 치른 엄마 장례식은 죽을 때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엄마 잘 계시죠?)

돌이켜보니 학창 시절에 내 술 한잔 안 마신 친구 없을 듯하다. 얼마 전 후배가 술 한잔 대접한다고 와서 형은 그때 우리한테 사준 술값이면 집 한 채 사고도 남았을 거라고 했다. 지금도 나는 집이 없다. 그래도 행복하고 편하다.

 

| 최의열(화가, 부천시의회 의원)

 

최의열 (화가, 부천시의원)
최의열 (화가, 부천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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