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18

<한 시대 다른 삶>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전시회 또는 책 제목을 의미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 삶의 행적과 방향이 정반대되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직접적으로 비교함으로써 나라와 민족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친일파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시대가 발전하더라도 인류 보편적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잃게 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인간이면 할 수 없는 행위들입니다.

<한 시대 다른 삶>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과 친일파 이응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선의 마지막 무관생도로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지청천 장군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어 여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에 반해 이응준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서 일제를 위해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조선 젊은이들에게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 일본 천황에서 충성을 다할 것을 선동하였습니다.

 

 

부천에도 <한 시대 다른 삶>이 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와 친일파 유명한입니다. 두 사람은 형제이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정반대였으며, 후세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유일한 박사(1895~1971)1926년 서울에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의약품의 수입, 판매, 제조 등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인들의 보건의료 향상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한약재 또는 한약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서양의학이 비중을 키우며 확장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양약의 공급은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각종 폭리를 취하고 있었으며 우리의 의약품 산업은 존립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유한양행은 이를 극복하고 보건의료 향상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독립운동은 대부분 미국에서 이루어집니다. 194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또한 동년 12월에는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 데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1942년에는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습니다. 이처럼 유일한 박사는 제약회사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서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유일한 박사와 부천의 인연은 1936년에 이루어집니다. 유일한 박사는 부천(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정 25)에 제약공장과 실험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제약회사에만 한정하지 않고 각종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공업교육 발전과 인재 육성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지금의 유한공고와 유한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유일한 박사는 <부천을 빛낸 분들> 6인 중 한 분으로 선정되어 부천시청 로비에 사진과 함께 활동 내용이 기록되어있으며, 중앙공원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명한(1908~1950)은 유한양행을 운영하며 여러 친일 행적을 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으로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친일 행적을 합니다. 19418월 유한양행 부사장으로서 동월 26일 전무 예동식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육군군기기금으로 써달라고 하며 1만 원을 헌금하였습니다. (1941828. 매일신보)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112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하며 유한애국기(柳韓愛國機) 한 대 가격인 53천 원을 종로경찰서에 기탁하였습니다. (19411228. 매일신보) 기부 내역을 자세히 보면 유한양행에서 27천 원, 만주 유한공사 1만 원, 유한무역회사 5천 원, 사장 1만 원, 직원 1천 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3천 원은 친일파들의 가장 큰 기부금액 중 하나였습니다.

 

 

유명한의 이러한 행적은 후에 유일한 박사와 절연한 계기가 됩니다. 유일한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동생의 친일의 길은 유일한 박사께서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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