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한시 산책 1

手植高松入採薪 손수 심은 높은 솔이 땔나무로 쓸 만한데

爺孃何處托孤魂 어버이의 외로운 혼 어디 의탁해 계시나

太平人作流離子 태평하던 사람 이제 떠도는 몸 되었거니

誰酌淸泉慰廢墳 누가 맑은 샘물 떠다 황폐한 묘 위로할꼬

(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 번역)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추석(秋夕」이라는 시다. 송익필(1534~1599)은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이자 학자로 삼노’, ‘팔문장’, ‘산림삼걸’, ‘위항삼걸등으로도 불린다. 모두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학문적 성취, 그리고 불운한 인생 역정을 일컫는 호칭들이다.

삼노(三奴)’는 미천한 신분이면서도 뛰어난 업적과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고청(孤靑) 서기(徐起),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을 말한다.

팔문장(八文章)’은 조선 선조 때 문명(文名)을 떨친 여덟 문장가 즉, 백광훈(白光勳), 송익필(宋翼弼),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최립(崔岦),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을 말한다.

산림삼걸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을 칭하는 말이며, ‘위항삼걸(委巷三傑)’은 선조 때의 서얼 신분 문학가인 박지화(朴枝華), 서기(徐起), 송익필(宋翼弼)을 일컫는 호칭이다.

송익필은 조선 중종 29(1534) 관상감 판관(判官) 송사련(宋祀連)과 연일 정씨(延日鄭氏) 사이에서 4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 감정(甘丁)은 정승 안당(安瑭)의 아버지 안돈후가 비첩(婢妾)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孽女)였다. 안씨 집안에서 감정을 황해도 배천(白川)에 사는 평민 송린에게 시집보내고 송린에게 관상감(觀象監) 하급 관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송린과 감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다. 안씨 집안에서는 송사련에게도 관상감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그에게 맡기다시피 하였으나,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모반하여 중종을 내쫓고 성종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다고 무고(誣告)하여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켰다. 이 일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 안처근 등 안씨 일문과 권전(權磌), 이충건(李忠楗), 조광좌(趙光佐) 10여 명이 처형되었으며 송사련은 안당 집안의 재산을 모두 차지하고 절충장군, 시위대장 등 당상관의 반열에 올라 30여 년간 세력을 잡고 종신토록 녹을 받았다.

송사련은 선조 8(1575)에 죽었는데 송익필이 53세가 되던 해인 선조 19(1586), 안당의 종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의 상소로 신사무옥이 무고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 송익필은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되었다. 이에 송익필과 집안사람 70여 명은 성과 이름을 바꾼 채 도망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돌며 도피 생활을 했는데 그사이 안당 후손들은 송사련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난도질했다.

송익필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으며 7~8세 때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 송사련의 행태가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던 탓에 더 이상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과거를 단념한 송익필은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아래 거처하며 성리학과 예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이이, 성혼, 정철과는 한번 만나 보고 그 즉시 마음이 통하여 평생토록 함께 절차탁마하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보물 제1415호인 삼현수간(三賢手簡)은 그가 성혼, 이이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간첩(簡帖)으로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渻), 정홍명(鄭弘溟), 강찬(姜澯), 김반(金槃), 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 구봉집(龜峯集)이 있다.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 산 147번지에 있는 송익필의 묘와 사당 ‘입한재(立限齋)’. 송익필은 63세 때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에 거처를 정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66세에 사망했다. (사진출처 대전일보)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 산 147번지에 있는 송익필의 묘와 사당 ‘입한재(立限齋)’. 송익필은 63세 때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에 거처를 정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66세에 사망했다. (사진출처 대전일보)

 

위 시는 송익필이 추노(推奴)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1586년 추석에 지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죽은 지 10여 년이 흘렀으므로 묘를 쓸 때 손수 심은 높은 솔이 땔나무로 쓸 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묘는 파헤쳐졌고 시신은 난도질당했다. 추노를 피해 떠도는 몸이니 추석을 맞아 파헤쳐진 묘마저도 찾아볼 길이 없다.

아버지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고 끝내는 노비로 환천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에 당신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건만 시에는 황폐해진 무덤이나마 찾아보지 못하는 불효자의 애통함만 가득하다. 다시 시를 읽어 본다.

 

| 현해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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