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명화로 보는 색채심리’ 20

간절함은 사소한 것도 역전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19세기 미국 출신의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는 파리 상류층의 초상화를 그리는 유명한 화가였다. 더 큰 성공에 욕심을 부리다가 쓰나미 같은 재앙을 만났다. 인생이 산산조각난 그는 다시 일어나려고 고군분투했다. 하루 10 여분만 영롱한 빛을 비추다가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기 위해 오랫동안 끈질기게 매달렸다. 1886년 작품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그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준 주옥같은 작품이다. 딥 포레스트 그린(deep forest green)으로 가득한 그림 속에 들어있는 성공의 비밀을 알아본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74x153.7cm,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갤러리, 영국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74x153.7cm,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갤러리, 영국

 

사전트는 부유한 안과의사인 아버지가 개업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의료 삽화가로도 활동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성공한 초상화가 카룰로스 뒤랑에게 개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사전트는 유럽에서 미술 활동이 자신의 예술세계에 확실한 앞날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1874년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영혼까지 갈아 넣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살롱전(Le Salon, 루이 14세부터 현재까지 열리고 있는 역대급 미술대회)’을 준비하면서 사교계에서 최고의 미녀로 추앙받던 은행가 피에르 고트로의 부인에게 모델을 부탁했다. 그림에서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사전트는 2m도 넘는 대작 마담 X의 초상화살롱전(1884)’을 빛낼 불후의 명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는 끔찍했다. 당시 사람들은 유명한 귀부인을 요염한 창부로 그린 것에 격분했다. 가슴과 어깨를 훤히 드러낸 옷차림이 퇴폐적이라고 여겼다. 더군다나 보석으로 장식한 어깨끈의 한쪽을 흘러내린 모습이 외설적이라면서 당장 그림을 치우라고 아우성쳤다. 이 소란은 일파만파 퍼져서 연일 파리를 뜨겁게 달구었고 각종 가십거리를 낳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데보라 데이비스도 이 초상화를 배경으로 <존 싱어 사전트와 마담 X의 추락>을 집필했다. 이것은 화약고에 불을 던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고트로 부인은 소설에서 당대 거물급 인사들과 바람피우는 여자 주인공과 동일 인물로 오해받았다. 불륜녀로 구설에 시달리던 부인은 견디다 못해 화려한 사교계를 은퇴하고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사전트의 명성도 한순간에 곤두박질쳤다. 그는 여론의 뭇매를 흠씬 두들겨 맞고, 어쩔 수 없이 어깨끈을 올려 그린 후 영국으로 도망치듯 이주하였다.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의 초상화', 235x109.9cm, 1883~1884,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오른쪽은 수정 후 작품)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의 초상화', 235x109.9cm, 1883~1884,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오른쪽은 수정 후 작품)

 

사전트는 런던의 작은 마을 코츠월드에 정착하였다. 어느 여름날 저녁, 삽화가 친구 버나드의 집에서 그의 어린 딸들이 중국풍의 종이 등불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았다. 황혼빛과 등불 빛으로 물든 정원의 풍경은 넋을 잃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는 친구의 두 딸인 11살 돌리와 7살 폴리를 모델로 삼았다. 174153.7cm 크기의 캔버스에 아스라이 사라지는 황혼빛을 담기 위하여 석양이 머무는 짧은 시간에만 붓을 들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모델과 그림 도구 등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두 해나 걸려서 1886년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였다.

필자는 코로나 이전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 그림에 화가의 고뇌가 서려 있었다. 제목은 당시 유행하던 팝 가수 조셉 마징기(Joseph Mazzinghi)의 히트곡 <화관>목자가 내게 말해의 후렴구에서 가져왔다. 사전트는 그림 그리기가 더딜 때마다 원래 제목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Carnation, Lily, Lily, Rose)를 살짝 비틀어 혼잣말로 <제기랄! 어리석군, 어리석어. 바보 같아(Darnation, Silly, Silly, Pose)>라고 하였다. ‘하루빨리 화단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 텐데.’ ‘2년이나 질질 끌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전트의 애끓는 심정이 혼잣말에 잘 담겨있었다. 10분 만에 사라지는 황홀한 노을을 그리려는 시도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을까? 바보짓이라고 여겼을까? 정원에 색칠한 딥 포레스트 그린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석양에 물든 천사 같은 두 꼬마 숙녀의 드레스, 종이 등불에 은은하게 번지는 담홍색과 진홍색, 살구색과 연노란색 불빛. 따뜻한 주황빛을 머금은 소녀의 얼굴과 조막만 한 손, 만발한 분홍 장미와 노란 카네이션과 하얀 백합, 이 모든 소재를 돋보이게 만드는 진한 녹색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였다. 비록 그림에서는 조력자일 뿐이지만, 화면에 가득한 딥 포레스트 그린에서 뿜어나오는 에너지는 절대자의 지지 같았을 것이다. 사전트에게 2년 동안 묵묵히 힘을 보태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다독이면서 강한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게 도왔을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작품은 1887년 영국 로열 아카데미에서 큰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 영국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되었다. 이후 초상화가로 승승장구하며 미국을 빛낸 화가로 인정받고, 세계의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걸리는 명예도 누렸다.

 

작업실에서 '마담 X의 초상화'를 그리는 존 싱어 사전트.
작업실에서 '마담 X의 초상화'를 그리는 존 싱어 사전트.

 

딥 포레스트 그린에는 내면의 힘과 통찰력을 주는 에너지가 있다.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주는 힘이 있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차분하게 생각하게 한다. 이 색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도 있다. 상대방의 의견과 가치관을 존중하지만, 자신과 다르면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한다. 적극적인 사회활동보다는 자기 세계에 집중하는 편이어서 창의적인 직업을 가진 예술가, 문학가, 크리에이터 등의 직업군이 찾는 색상이다.

신뢰감을 주는 딥 포레스트 그린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돕는다. 상담소나 법률사무소, 마사지숍이나 독서실 등의 인테리어에 좋은 컬러다. 칠판도 같은 색상이다. 그린은 시야각을 가장 좁게 차지해서 눈을 자극하지 않는다. 칠판을 보면 눈이 덜 피로하고, 집중이 잘 되며, 학습 능률도 올라가는 이유다.

소비자의 컬러 취향이 다양해졌다. 무채색 위주의 단정한 색상에서 점차 통통 튀는 과감한 컬러로 변주하고 있다. 자동차나 전자제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그린 컬러는 독특한 개성과 세련된 색으로 다가왔다. 진한 녹색은 클래식하고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기품과 진중함을 더해주는 딥 포레스트 그린은 고성능 기아자동차 2021년 모델 EV6K8 하이브리드의 대표 색상이다. 2020년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SUV GV80’도 진한 그린 색상을 선보였다.

 

EV6딥포레스트그린
EV6딥포레스트그린
전북축구단 엠블럼
전북축구단 엠블럼

 

그린 컬러는 당당하게 실내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2018년 삼성은 진한 녹색의 비스포크(BESPOKE) 냉장고를 출시했고 현재까지 다양한 그린 계열을 선보이고 있다. 2020LG도 포레스트 그린 색상의 트롬 세탁기로 유행을 이끌었다.

<전북 현대모터스 FC>1994년에 현대그룹이 창단한 프로 축구단이다. ‘녹색 전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2009년부터 2020년까지 K리그 1에서 최다 우승을 기록했다. 구단의 엠블럼은 딥 포레스트 그린 바탕에 부여군 규암면 외리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의 기와 봉황 문전을 단순화하여 하얀색으로 디자인하였다.

딥 포레스트 그린은 건강한 색깔이다. 내면에 힘을 주는 든든한 조력자다. 실생활에 담겨있는 이 색상은 좋은 에너지를 내뿜는다. 바이올린의 중간 음색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사색하게 한다. 무기력하고 짜증 날 때 사전트 그림 속의 짙은 녹색과 소녀의 주황빛 얼굴 색감을 참조하여 주변을 꾸며보자. 바라만 보아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짙은 녹색은 활기를 주는 따뜻한 색감을 만나면 금상첨화의 효과를 낸다. 기분이 금방 좋아지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김애란(화가, 미술 심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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