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의 설립과 활동 20

1919년 국내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일어난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저항과 저력에 놀란 일제는 통치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그리고 한국어 신문이 발행될 수 있도록 허가해주었습니다. 겉으로는 전보다 유()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1930년 들어서면서 제국주의적 면모를 다시 드러내며 노골적인 정책으로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합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침략전쟁을 실행하기 위해 부족해진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이전보다 강력한 강제동원 정책을 폈으며, 이러한 정책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민족말살정책을 더 강력히 추진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내선일체 강화

일제는 강제병합 초기부터 내선일체를 진행합니다. 조선과 일본은 하나로서 조선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두 번째, 역사 왜곡

식민사학을 통해 조선인들의 정신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민족정체성을 훼손하는데 역사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황국신민화

일본 천황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궁성요배는 일왕이 있는 궁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사참배는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세운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 다 일본화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1915년 신사사원규칙을 제정하여 우리나라 곳곳에 신사를 세웠는데 우리 부천에는 1917년 소사신사(현 심곡도서관)가 세워졌으며, 1940년 오정신사(현 도당교사거리 부근)가 세워졌습니다.

네 번째, 창씨개명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와해시키려고 했습니다. 창씨개명은 조선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주도한 정책으로 19402월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인들에게 모든 가족이 호주(戶主)의 씨()를 쓰는 일본식 제도를 따르게 함으로써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제에 적합하도록 조선의 가족제도를 개조하는 목적 아래 강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책들이 우리 부천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을까요?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궁성요배

<부천군 청년단 결성식>194177일 오전 10시 소사북국민학교 교정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군내 10개면 청년대 오천여 명과 관민 유지 등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단기입장, 궁성요배, 국가합창, 영지봉독, 황국시민 만세삼창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매일신보 1941.7.9)

<소사읍 승격 기념식>1941101(소사면에서 소사읍으로) 진행되었는데, 참석자 전원이 신사에 참배하여 봉고제를 행한 후 궁성요배, 국민의례, 만세삼창 등을 했습니다. 안동군수(장영한)의 식사와 초대읍장인 원촌임(元村稔)의 인사가 있었습니다. (매일신보 1941.10.3)

*궁성요배 (宮城遥拝 규조요하이)는 일본 제국과 그 식민지들의 주민들이 고쿄(궁성)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던 예법을 가리킨다.

 

 

<소사읍 기원가절> 행사가 1942211일 진행되었는데 대동아전쟁 하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기원가절임으로 국민총력 소사읍연맹에서는 각호에서는 국기를 게양하고 당일 오후 9시를 국민봉축 시간으로 정하여 각 관공립학교, 은행회사, 공장 등에서는 봉축식을 거행하며 기원 2600년 기원절에 소회를 봉독하고 기타 각 가정에서는 사이렌에 맞추어 궁성요배와 필승기원을 하였습니다. (매일신보 1942.2.8)

 

 

<대일본부인회 부천, 소사읍지부결성식>1942428일 오후 1시 소사북국민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안동군수(장영한군수=안동영한군수) 인천경찰서장을 비롯하여 군내 각관공서장 부인회원 3천여 명 참석하에 진행되었으며 궁성요배 국가봉창 묵례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매일신보 19425.1)

 

두 번째, 창씨개명

1940211월부터 진행된 창씨개명은 부천에서 1940420일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참씨취지보급, 소사면에서-[소사]지난 15일 부천군 소사면에서는 구장진흥회 징도작간부 등 백여 명을 소집하야 씨() 제도에 대한 취지를 철저히 주지한 후 우선 관공리는 물론 점차 유식계급자로서 솔선 실시하도록 한 결과 면직원은 전부 제출하기로 되었다 한다.” (매일신보 1940.4.20.)

창씨개명의 구체적 정황은 군수들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8대 부천군수인 장연한(1937.11~1942.6)은 안동영한으로 신문 기사에 자주 나옵니다. 안동 장씨라 안동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학원 사성을 지낸 부천의 친일파 박제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제봉은 죽성 제봉(竹城 濟鳳)으로 창씨개명하고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 전별시를 남겼는데 미나미 지로를 살아있는 부처[活佛]로 칭송하였습니다. 박제봉은 죽산 박씨입니다.

부천군은 일제 당시 10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면장의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역()

영흥면

용유면

영종면

오정면

소래면

1940

林善璟

朝山注鎔

金本顯稷

富山榮三

金井正雄

1941

林善璟

조산주용

金本正一

富山榮三

金井正雄

지역()

대부면

덕적면

북내면

계양면

소사면

1940

金城享昌

金泰涉

金山宗平

海原朝植

元村稔

1941

金城享昌

金泰涉

白川昌德

海原章行

元村稔

- 출처 : 1940, 1941년 조선총독부 관보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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