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 빈민지역 봉사활동을 떠나는 단체가 있어서 함께 한 일정입니다. 낯선 곳을 간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합니다. 필리핀은 처음 가보는 나라라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총기소지가 자유로우면서 치안이 허술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고 최근에도 한국인들을 표적으로 하는 범죄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3~4일 다녀오면서 그런 걱정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홈스테이를 포함하여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일정이라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마닐라 공항. 밤 11시가 지났는데도 사람들과 자동차로 정신이 없다>
방문한 곳은 칼라바르손 지방(Region) 리잘주(Province)의 산마태오 지역입니다. 수도인 마닐라시가 포함된 메트로마닐라와 인접한 주입니다. 의회 일정을 마치고 가려다보니 저녁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가항공을 이용했더니 기내식도 없이 기내에서 판매하는 컵라면을 사먹어야 했던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마닐라 공항에 도착한 시각이 밤 11시. 반팔을 입어야 하는 날씨였습니다. 늦은 밤인데도 공항과 시내에는 교통체증이 심했고 매연이 가득했습니다. 지프처럼 개조하여 대중교통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지프니’에 매달려 귀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로웠습니다.
 
아침에 본 거리의 인상도 비슷했습니다. 토요일인데도 거리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복잡했습니다. 어제 밤에는 보지 못했던 씨클로(오토바이 옆에 좌석을 덧붙인 교통수단)의 소음도 한 몫 했습니다. 군데군데 있는 구멍가게에서 아침밥이며 반찬꺼리를 팔고 있는 모습은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비슷한 풍경입니다. 숙소인 선교센터 주변을 둘러보니 가난의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하수처리가 되지 않은 도랑물이 흐르고 개와 고양이가 골목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유독 많아 보입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의 현실과는 판이합니다.
 
홈스테이 가정이 있는 마을로 이동했습니다. 호스트가 공무원이라 현지 생활과 사정을 많이 알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행정구역은 17개의 지역(Region)아래 81개의 주(Province)가 있고, 그 아래에 지자체(City 또는 Municipality)들이 있으며, 최저 자치단위로는 바랑가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묵은 곳은 스타아나(Sta ana)라는 바랑가이이며 인구는 1만명 정도인데, 싼마태오에는 이런 바랑가이가 15개 있습니다. 바랑가이는 원래 소규모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행정단위가 됐다고 합니다. 각 바랑가이에는 7명씩의 의원이 있고 캡틴이라 불리는 단체장도 있는데, 아직까지도 공동체적 속성이 많이 남아있고 캡틴은 유력 가문에서 대를 이어 선출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네요.
 
홈스테이를 허락한 루엘 사페틴씨는 싼마태오의 부시장실에서 일합니다. 시장과 부시장이 모두 선출직인데 부부라고 합니다. 연임제한에 걸리는 남편을 대신해서 다음에는 부시장이 시장으로 출마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필리핀의 정치가 민주화와 거리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축출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멜다는 하원의원으로 재기했으며 그 자녀들도 주지사, 상원의원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바랑가이에서 부터 지자체, 그리고 정부에 이르기까지 필리핀의 정치는 아직도 유력가문이면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986년 필리핀의 민주화를 가져온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부인인 아키노 여사가 대통령을 지냈는데 지금의 대통령은 그 아들이라고 합니다. 지폐에 아키노 부부의 초상이 있는 것을 보며 민주화의 영웅들이 대접받는 것이 부러우면서도, 아들이 대통령이니 가능한 일은 아닌가하는 꼬부장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키노부부를 기리는 시계조형물. 아키노 부부의 초상은 500페소 지폐에도 있다.>
사페틴씨의 집은 나무판자로 지은 2층집인데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1층에는 ‘사리사리 스토어’라고 불리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고, 여러 개의 방이 계단을 통해 미로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태풍이 자주 오는 곳이라 날아 갈 위험도 있다고 합니다. 나무가 깔린 2층 발코니에 앉으면 펌프가 달린 동네 우물과 간이 농구장이 보입니다. 팽이를 돌리는 아이들과 농구하는 젊은 사람들로 시끌벅적 합니다. 그 뒤로는 우기 때는 침수된다는 넓은 습지가 있고, 그 너머 멀리 보이는 캐손시티의 전원주택들은 딴 세상처럼 평화롭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의 농구 사랑은 정말 끔찍한 것 같습니다. 조그만 공터만 있으면 여지없이 농구골대가 매달려 있고 사람들이 왁자합니다. 집밖으로 나가면 좁은 골목입니다. 집들은 대부분 나무판자로 만든 2층 집입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벗어나서 만나는 조금 큰 골목길 좌우에도 비슷한 집들이 있는데, 평상이나 의자를 내 놓고 나와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밝은 표정이며 외국인인 제가 지나가도 반갑게 인사합니다. 사페틴씨의 집처럼 과자나 식료품들을 파는 구멍가게가 많습니다. 물건들을 집어갈까봐 철창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이채롭습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밤에도 사람들이 많은데 가라오케를 내놓고 노래자랑이 열리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동네입니다.
 
일요일 오후가 되니 거리가 수런수런 합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산토니뇨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라고 합니다. 얼굴에 분장을 하거나 화려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골목마다 가득합니다. 무리의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 조각상을 모신 꽃수레가 있습니다. 축제가 시작되자 이런 꽃수레 무리가 수도 없이 큰 길로 나옵니다. 성당마다 하나씩 가져나온 수레라고 합니다. 수레마다 요란한 음악을 틀어놓고 있으며 춤을 춥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사탕을 뿌리기도 합니다. 모두가 구경꾼이고 모두가 축제참가자입니다. 억지로 구경꾼을 모으려고 애쓰는 우리의 축제들이 생각났습니다.
 
비록 며칠이지만 필리핀을 다니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청년들이 많은 것은 특별한 부러움이었습니다. 선교라는 제목으로 활동하는 한국인들도 몇 분 만났습니다. 헌신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모습을 보면서 선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어리석음도 깰 수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우리 시에 국제지원기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국과 교류하는 부천시의 단체들이 제안하는 사업-예를 들면 빈곤지원, 환경보호, 거류교민 지원 등에 부천시의 이름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목적의 기금이 되겠지요. 북한의 지자체와의 교류에 쓸 수 있게 남북교류기금을 만들었듯이 국제지원기금을 만든다면 지자체 차원의 국제교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연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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