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느림의 미학이라 주장하며 늑장 부리는 사춘기 아들이다. 오늘도 시간이 임박해서야 학원으로 간다.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누에고치처럼 틀어박혀 엄마의 방문은 절대사절이다. 아들 방에 진입할 기회가 왔다. 청소기를 들고 얼른 아들 방에 들어가 봤다. 옷가지들이 곱슬머리처럼 구부러진 채 널브러져 있고, 익숙한 미용실 냄새가 방안 가득하다.

아들은 심한 곱슬머리라 어릴 때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유지했다. 중학생이 되더니 짧은 머리는 질색이다. 곱슬머리라 길이가 길어질수록 한껏 부풀어 오른다. 유전의 힘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아들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나보다. 슬쩍 아들의 사춘기에 밀리던 엄마는 속으로 고소함을 감출 수 없다.

드라이를 해도 곱슬기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한껏 부풀어 헬멧을 쓴 모양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여동생은 학교에서 굳이 오빠를 찾지 않아도 둥둥 떠다니는 머리가 눈에 띄어 금방 찾을 수 있단다. 자기 딴에는 차분하게 가라앉혀 보겠다고 검정색 점퍼에 달린 모자를 눌러 쓰고 다닌다. 곱슬머리와의 전쟁이다.

사촌들도 심한 곱슬머리다. 저녁마다 머리를 감고 젖은 채 수건으로 꽁꽁 싸매고 잤다. 그런 수고와 노력에도 스핑크스 머리가 되는데 저녁의 행사를 깜빡이라도 하면, 다음 날 아침은 사촌들의 울음소리와 큰엄마의 고성이 마당을 뒤흔들었다. 드라이기가 생기기 전의 풍경이다. 머리 때문에 속상해하던 사촌이 종종 다리미로 머리를 피고 싶다고 했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되었다. 매직기라는 기기가 나왔다. 다리미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이다. 긴 직사각형의 판을 맞물리게 머리를 집어 서서히 내려가면 거짓말처럼 생머리가 된다.

평소 멋 내기에는 관심이 없는 무던한 성격이라 적당히 멋을 부리는 아들로 자라기를 바랐으나, 감쪽같이 펴지는 머리는 아들의 마음을 흔들어 이제는 손에서 매직기가 떠나지를 않는다. 아뿔싸, 엄마가 원하는 공부는 뒷전이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전기료 반은 네가 쓴다고, 방문에다 미용실 문패 달자고 잔소리를 해대는 엄마의 목소리는 귓등으로 흘려보낸다.

발명품은 불편함을 이겨내기 위해 생겨난 것들이다. 곱슬머리라는 불편함이 매직기라는 기기를 만들어냈다. 열심히 매직기로 자신의 머리를 펴 대는 아들도 힘이 드는 모양이다. 생각처럼 되지 않아 혼자 끙끙대고 있을 때는 안쓰럽기도 하지만 답답해서 대신 해준다. 시간 소비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목울대를 넘어오기 직전이다. 아들과 해야 할 언쟁이 떠올라 속으로 꿀꺽 삼킨다.

아들의 머리는 곱슬기가 심해 젖은 상태에서 매직기를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잘 펴지지도 않는다. 머리를 말리고 난 뒤 해야 한다. 엄마가 짧은 시간에 거의 직모로 만들어 주니 이 순간만은 사춘기는 어디다 맡기고 왔는지 고분고분하다. 뒤통수에다 주먹손을 날려본다.

아들이 오월의 초록처럼 상큼한 샴푸 냄새를 풍기며 꼬불꼬불한 머리를 엄마에게 맡기고 의자에 앉았다. 파마를 한 듯 꼬여있는 머리는 절대 날 건드리지 마.’라며 방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의 아들의 둥근 등짝 같다. 마음대로 꼬여있을 때의 아들 마음 같기도 해서 보기가 싫지만 어쩌겠는가. 드라이기를 작동한다. ‘~’ 드라이가 작동되고 뜨거운 바람이 물기를 말린다. 아들을 향한 축축한 마음도 함께 말려본다. 아들에게 잔소리하고 같이 언쟁을 하던 냉랭한 마음도 녹기를 바라며 강풍을 쏘인다. 드라이의 열기에 곱슬기가 많이 가셨다. 존재만으로도 예뻐했던 어렸을 적 아들의 미소가 떠오른다. 엄마의 욕심과 기대로 요구만 했나 싶다. 그 마음을 내려놓고 따스한 시선으로 아들을 본다면, 돌린 등과 잠긴 방문을 열고 나를 향해 걸어올 것 같아 내 마음에도 드라이의 훈풍이 윙윙 불어온다.

이제 매직기 차례다. 머리를 집었다. 매직기가 서서히 지나간 자리는 써레질을 끝낸 밭처럼 매끈하다. 겨우내 묵었던 밭을 갈며 잡석은 골라내고 흙을 부드럽게 만들며 풍성한 푸성귀를 꿈꾸는 농부의 마음처럼, 아들과 엄마 사이의 묵었던 감정들과 비수가 되었을 말과 행동을 골라내듯 꼬불꼬불한 머리를 지그시 누른다. 아들은 자신의 밭에서 원하는 농사를 지을 것이다. 뽕잎으로 누에를 쳐서 아름다운 비단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부드러운 비단처럼 고운 꿈을 품고 있을 아들에게 엄마의 욕심으로 낸 생채기들이 안타까워 손길이 바빠진다.

잠깐의 어지러운 마음 때문인지 순간 머리들이 엉켰다. 일정한 양을 정해진 방향대로 해야 하는데 머리를 많이 집은 모양이다. 아팠을 텐데도 아들은 미동도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직모를 위한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가 보다. ‘공부를 이렇게 끈기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이 고개를 내밀지만 얼른 마음을 접는다. ‘그래,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때는 지금처럼 꿋꿋하게 잘 이겨낼 거야. 어떻게 알겠어? 곱슬머리라는 자신의 불편함 때문에 매직기보다 더 획기적인 발명품을 생각해낼지.’ 세상에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있다. 남자도 파마머리를 하고 레게머리로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곱슬머리를 잘 손질하면 자신만의 헤어스타일이 될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고집이 느슨해지면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한 아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매직기는 일정한 온도로 일정한 시간을 가해야 한다. 급한 마음에 손길이 너무 빠르면 잘 펴지지 않고 잠깐 시간이 지체되면 머리카락이 타기도 한다. 곱슬거리는 정도와 머릿결의 상태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 엄마가 보기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을 택한다고 해도, 조바심을 내지 않고 적당한 사랑과 관심으로 기다려 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의 상념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를 만지며 아들이 엄마에게 웃음을 날린다. 봄 햇살처럼 따사롭다. 직모로 변한 머리를 한 아들의 표정엔 사라진 곱슬머리처럼 엄마와 벌인 사춘기 전쟁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손에 들린 매직기를 바라본다.

대단한 신무기다.

 

| 김혜영(수필가, 2014년 문학이후 수필 등단, 부천소사문학회 회원, 부천문인협회 회원)

 

김혜영 수필가
김혜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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