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의 ‘아름다운 베르네川’

베르네천 산책로를 지나는데 향긋한 풀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주인 행세를 하던 잡초가 날카로운 예초기에 사정없이 잘려 나갔다. 고속 회전 날이 무섭게 돌아가면, 무성한 잡초들이 칼날의 무자비함에 속절없이 드러눕는다. 무성하게 자란 머리카락을 자른 듯 시원해 보인다. 한편으론 허전하다. 풀 깎는 작업을 올해 들어 세 번째 보았다. 풀이 마르는 가을로 접어들어 더는 깎는 작업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날카로운 예초기에 사정없이 잘려 나간 잡초
날카로운 예초기에 사정없이 잘려 나간 잡초

 

백로와 입추가 지났다. 처서를 지나면서 완연한 가을이 왔다. 선조들은 처서를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라고 하였다. 24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로 모기의 입이 삐뚤어지고, 풀은 울며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풀이 땅속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여 더는 자라지 않고 맺힌 씨앗을 여물게 하는 시기다. 추석을 맞아 벌초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나무도 물을 빨아들이지 않고, 겨울에 얼어 죽지 않을 만큼의 수량만 보유하고 땅속뿌리로 수액을 내려보낸다.

 

경사면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의 모습
경사면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의 모습

 

양력 달력에도 24절기를 써놓아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절기는 중국의 계절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기후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날짜가 경도에 따라 변하므로 절기의 날짜가 매년 양력은 같지만, 음력은 다르다. 음력 날짜가 계절과 차이가 크게 날 때는 윤달을 넣어 계절과 맞게 조정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절기에 맞춰 농사 관련 일을 하였다. 조선 중기 실학자 정약용 선생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쓴 농가월령가는 절기에 따른 농사와 세시풍속에 관한 가사다.

잡초의 사전적 정의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불필요한 풀이다. 말 그대로 잡풀이다. 지구의 모든 식물은 잡초였다. 이기적인 인간이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작물과 잡초로 나눴다. 인간의 필요 때문에 재배하는 식물은 작물’, 불필요한 식물에는 잡초라는 잣대를 들이댔다.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고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잡초라고 부른 것이다. 사람의 살가운 시선을 못 받지만, 자리를 말없이 지키면서 짓밟히고 뽑혀 잘려 나가는 고난과 고통을 겪는다. 베르네천 산책로, 인근 산자락의 산책로와 도로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자라 마주친 대부분이 잡초다.

 

경사면에서 자란 개망초가 꽃밭을 만들었다.
경사면에서 자란 개망초가 꽃밭을 만들었다.

 

베르네천 주변 산책로를 걷으면 다양한 풀을 만났다. 쑥과 제비꽃, 돌나물과 씀바귀, 토끼풀과 쇠뜨기, 냉이와 쇠별꽃, 개망초와 비름, 소루쟁이와 질경이, 메꽃과 금계국, 질경이와 애기땅빈대, 고들빼기와 씀바귀, 한삼덩굴과 바랭이, 돌미나리와 고마리, 돌피와 개여뀌, 강아지풀과 애기똥풀 등 여러 풀이 뿌리를 내리고 산다. 이름을 얻지 못하였거나, 이름을 알지 못하는 풀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풀의 이름과 가치를 모르면 무조건 잡초라고 부른다.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소중한 약초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몸이 아팠을 때 먹는 약은 대부분 식물에서 추출한 성분을 이용하여 만든다. 사람에게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잡초지만 소중하다. 야생 동물의 먹이이며, 씨앗은 새들의 주식이다. 아메리카 체로키 인디언 추장 구르는 천둥은 일찍이 문명인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식물을 잡초라고 부르는데 이 세상에 잡초라는 것은 없다. 모든 풀은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를 지니고 있고, 쓸모없는 풀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풀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베르네천 중간 자점 군락을 이룬 돌피
베르네천 중간 자점 군락을 이룬 돌피

 

베르네천 중간쯤 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 하천을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그 바로 위쪽 수양버들 옆에 돌피라고 부르는 잡초가 군락을 지어 산다. 바랭이처럼 쑥쑥 잘 자라지만, 열매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양의 덕을 갖춘 풀이라고 예찬하는 사람도 있다. ‘돌피는 벼나 밭작물을 기를 때 보이는 대로 뽑아내는 잡초로 생명력이 강하다. 농작물이 태풍에 쓰러지거나 병충해로 곡식을 수확하기 어려워도 돌피씨앗은 튼실하게 여문다. 흉년 들어 식량이 부족할 때 돌피의 씨앗을 말렸다가 가루로 빻아 죽을 쑤어 피죽으로 허기를 달랜 데서 나온 말이다.

베르네천 주변은 풀들의 전시장이다. 큰비가 내린 후, 땅속의 많은 잡초 씨앗이 물에 떠내려가 이동한다. 베르네천 주변을 산책하면 지난해에 보지 못했던 여러 풀이 많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씨앗이 바람에 날리거나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 붙어 이동하면서 떨어져 자라기 때문이다.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가 소화되지 않는 씨앗이 배설되어 싹을 틔운다. 제비꽃은 개미들이 단백질 덩어리로 감싼 씨앗을 먹이로 가져가면서 영토를 넓혀간다. 잡초는 다른 식용작물보다 씨앗 배출이 30배 이상으로 많다고 한다. 국립농업과학원 자료에 의하면, 깊이 2cm, 넓이 가로세로 1미터 내의 땅속에 논에서 2만 개, 밭에서는 4만 개에서 8만 개의 잡초 씨앗이 있다고 한다.

 

베르네천에 무성한 수생식물인 방동사니와 물억새 등.
베르네천에 무성한 수생식물인 방동사니와 물억새 등.

 

우리는 풀에 대해 너무 모른다. ‘단오 전에 나는 풀들은 모두 먹을 수 있다.’라는 말처럼, 봄의 연한 잎들은 좋은 식재료다. 쑥이나 미나리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쇠비름나물은 골다공증을 막는데, 오래 먹으면 장수한다고 장명채라 부른다. 한삼덩굴도 혈압에 좋은 성분이 알려졌다. 생태계 교란종 단풍잎돼지풀도 항산화 성분이 있다. 토끼풀은 식물 성분 단백질 함량이 높다. 물을 머금은 질경이 씨앗 특성을 활용해 다이어트 식품을 개발하였다. 명아주의 줄기는 단단하고 가벼워 지팡이를 만든다. 통일신라 때부터 장수 노인에게 왕이 하사하던 청려장靑藜杖의 재료다.

 

부천노인병원 앞 경사면에 한삼덩굴과 개망초가 경쟁하며 사는 모습
부천노인병원 앞 경사면에 한삼덩굴과 개망초가 경쟁하며 사는 모습

 

개똥쑥은 말라리아 치료제로 개발한 중국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안겨주었다. 스위스의 메스트랄은 옷에 한 번 들러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골칫거리인 도꼬마리 열매의 특성을 관찰해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velcro)’를 개발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특허품의 하나인 벨크로를 만들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곳에서 가장 먼저 시퍼렇게 돋아나 지옥에서 살아난 잡초로 불리는 쇠뜨기는 삶의 역경에 맞설 용기를 준다. 민들레는 밟힐수록 옆으로 자라는 기막힌 지혜를 가졌다. 애기땅빈대도 암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주목을 받는데 사람의 통행이 붐비는 길 위에 납작 엎드려 짓밟히면서 살아간다.

잡초라고 무시했던 풀도 알고 나면 보물이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풀에 관심을 가져보자. 몸에 좋다는 산삼도 그 성분을 알려지기 전까지는 잡초였다. 생명(生命)은 문자 그대로 살라는 하늘의 명령이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잡초에게 삶을 배운다.

 

| 김태헌(수필가, 한국공무원문인협회 사무국장)

김태헌 수필가
김태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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